[열려라 경제] 아하 그렇구나
불황에 대한 공포로 가계·기업 꼼짝안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11일 기준금리를 연 4%에서 3%로 1%포인트 내리는 사상 최대폭의 금리 인하를 단행했습니다. 통화정책 수단이 통화량에서 기준금리로 바뀐 1999년 이후 기준금리가 3%로 내려간 것은 처음입니다. 경기가 급속도로 하강하고 있고, 내년 경제성장률이 2%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에서 과감한 통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고 한은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대폭 내렸다는 것이죠.
한은의 금리 인하 조처에 시장은 반색했지만,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게 아니냐는 걱정입니다. 유동성 함정이란, 경기 부양을 위해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춰도 투자와 소비는 늘지 않는 현상을 말합니다. 통화정책이 마치 함정에 빠진 것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1930년대 대공황 때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아,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의 정책금리가 낮아져 시중금리 하락으로 이어지면 기업은 싼 이자로 자금을 빌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투자와 생산이 늘어나고, 고용이 늘어나게 됩니다. 소득도 늘어 소비가 증가합니다. 시중 자금이 풍부해지면 가계 소비도 늘어나 생산과 투자를 부추깁니다. 이렇게 맞물려 경기가 상승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동성 함정에 갇히게 되면, 통화정책은 약발이 전혀 없습니다.
1990년대 일본의 장기 침체가 그 예입니다. 당시 일본의 금리는 0%에 가까울 정도로 낮았고,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금리는 마이너스였습니다. 그런데도 돈을 빌려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기업이나 가계에서 돈을 빌려가 투자를 하거나 소비를 해야 경기가 살아날 텐데, 돈을 쓰지 않은 것이지요.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겁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기업이나 가계 등 경제주체들이 미래를 어둡게 보기 때문입니다. 경기가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계는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생산을 줄이고 투자를 미루게 됩니다. 그러면 경기는 더 나빠지게 되지요.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려 경기가 살아나야 정상인데, 불황에 대한 공포로 가계와 기업은 꿈쩍도 않습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