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대출 사실상 올스톱” 얼어붙은 돈줄
대기업처럼 회사채 발행하기도 쉽지않아
대기업처럼 회사채 발행하기도 쉽지않아
국내 한 중견그룹 재무팀의 윤아무개(36) 과장은 최근 한달 동안 일주일에 나흘은 밤 12시 넘어 귀가하고 있다. 송년회 탓이 아니다. 은행의 특정 그룹 담당자인 아르엠(RM· Relationship Manager)이나 여신 담당자들을 만나는 저녁 술자리 때문이다. 윤 과장은 “평소 우리와 거래하지 않던 은행들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간다”고 말했다. 식사를 핑계로 한번 만나기라도 하려면 주위의 온갖 연줄을 동원해야 한다. 윤 과장이 최근 접촉한 데만 국내은행 7곳, 외국계은행 6곳, 증권사 4곳이라고 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은행 사람들이 꺼내는 첫마디가 ‘미안합니다’ 입니다. 우리가 만나달라고 한 용건이 뭔지 뻔히 알고 있으니, 선수를 치는 거죠.” 계열사에서 운영자금 100억원이 필요해 신규 대출을 부탁했지만, 단 한군데에서도 대출을 받지 못했다. 다른 업체에 줄 대금 지급을 최대한 늦추고, 울며 겨자먹기로 매출채권도 이전보다 세배 가까이 높은 할인율로 현금화하며 버티고 있다.
“은행 사람들은 ‘정부가 계속 체크하고 있기 때문에 중기 대출은 줄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삼성이나 엘지 등 거대그룹은 문제가 없지만 ‘중간에 낀’ 우리같은 기업들은 죽어나는 꼴이죠.” 실제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라고 은행을 압박하는 데는 대통령까지 나서고 있다. 정부는 또 4조원을 웃도는 정책자금을 중소기업에 싼 이자로 빌려주기로 하는 등 중소기업 지원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윤 과장은 “은행들이 앞다퉈 찾아와서는 돈 좀 써달라고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작 돈이 필요할 때는 나몰라라 하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룹 본부에서 자금을 확보하고 있어도 계열사한테 직접 지원하는 길은 제한돼 있다. 이 때문에 주력 계열사가 나서서 은행에 “수백억원을 예금할테니, 대신 다른 계열사에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거부당하기 일쑤다. 10대 그룹에 속하는 한 그룹 관계자마저 “은행들이 비아이에스(BIS) 비율을 맞추겠다고 대출을 거절한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다른 그룹의 자금 담당부서와 연락해 상대방 계열사의 기업어음(CP)을 서로 사주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증권업협회 자료를 보면, 12월에 회사채를 발행한 곳은 현대차·에스케이(SK)브로드밴드·롯데건설·삼성물산·에스케이네트웍스·호텔신라·엘지(LG) 등 대체로 10그룹에 드는 회사들 뿐이다. 중견그룹들은 회사채를 발행할 엄두를 못낸다. 중견 그룹 관계자는 “운영자금 사정이 이렇게 팍팍했던 적은 이전에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의 재무팀장은 차입금 상환 연장을 거부당하자 “부도를 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면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버텨, 은행으로부터 경우 상환 연장을 받아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지난 11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1%포인트 대폭 인하하면서 한때 ‘BBB-’급 회사채 금리가 12.05%까지 내려갔으나 이후 다시 상승해 지난 26일 현재 12.23%를 기록하고 있다. 국고채와 견준 금리 차도 일시적으로 좁혀졌다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 기업들의 자금조달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 중견 건설회사 임원은 “이전에 시중에 돌아다니는 돈의 양이 100이었다면 지금은 20에도 못미치는 것 같다”며 “대출이 올스톱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죽을 맛이기는 은행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을 끌어 올리라고 요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대출을 늘리라는 상반된 요구를 동시에 내놓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사정이 어려운 업체 사람들이 은행에 찾아와 살다시피 하지만, 은행들도 제 코가 석자라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환위기 당시 돈이 없는 기업들이 은행이나 종금사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그때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은행 문턱이 높다보니 12월 들어서는 자금이 급히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빌리는 ‘브리지 론’을 받으려고 증권사들을 찾는 기업이 늘었다. 한 증권사의 임원은 “은행들이 ‘내년에는 돈을 빌려주겠다’는 말만 하면서 돈줄을 막자, 당장 돈이 필요한 기업들이 (증권사로) 찾아와서는 한달이나 석달 정도 기업어음을 인수해 달라고 요청하곤 한다”고 전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건설사들도 찾아온다고 귀띔했다. 이 임원은 “신용등급이 ‘A’인 제조업체도 찾아왔는데, 브리지 론을 통해서라도 연말 연초를 버티어 보려고 하는 것 같다”며 “현재 금융권에는 돈이 넘쳐나지만 그 안에서만 돌 뿐 기업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필요한 자금을 제 때 못받자, 주거래은행을 바꾸는 일도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직원들의 월급 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회사들이 요즘 생겨나고 있다”며 “먼저 월급 통장을 바꾼 뒤 기업금융도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식”이라고 말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은행 문턱이 높다보니 12월 들어서는 자금이 급히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빌리는 ‘브리지 론’을 받으려고 증권사들을 찾는 기업이 늘었다. 한 증권사의 임원은 “은행들이 ‘내년에는 돈을 빌려주겠다’는 말만 하면서 돈줄을 막자, 당장 돈이 필요한 기업들이 (증권사로) 찾아와서는 한달이나 석달 정도 기업어음을 인수해 달라고 요청하곤 한다”고 전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건설사들도 찾아온다고 귀띔했다. 이 임원은 “신용등급이 ‘A’인 제조업체도 찾아왔는데, 브리지 론을 통해서라도 연말 연초를 버티어 보려고 하는 것 같다”며 “현재 금융권에는 돈이 넘쳐나지만 그 안에서만 돌 뿐 기업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필요한 자금을 제 때 못받자, 주거래은행을 바꾸는 일도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직원들의 월급 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회사들이 요즘 생겨나고 있다”며 “먼저 월급 통장을 바꾼 뒤 기업금융도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식”이라고 말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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