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헤지 통화옵션상품인 ‘키코’ 계약에 대한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이 내려진 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법원 앞에서 키코피해기업공동대책위원회의 한 회원이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은행, 키코소송 1심 ‘판정승’ 했지만
일부 ‘고객보호의무 위반’ 인정 사건별 판단여지 남겨
“상대적 약자에 지나쳐” 지적도…피해 기업들 항소 뜻
일부 ‘고객보호의무 위반’ 인정 사건별 판단여지 남겨
“상대적 약자에 지나쳐” 지적도…피해 기업들 항소 뜻
■ ‘불완전 판매’만 일부 인정 2008년 금융위기를 전후로 불거진 이른바 ‘키코 사태’는 경제계를 넘어 사회적으로도 큰 이목을 끈 사안이었다. 피해 기업들의 핵심 주장은 키코 상품이 기본적으로 은행에 유리하게 설계된 ‘불공정 상품’이라는 것과 그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불완전 판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환율이 내려갈 때 기업들이 보는 이익은 한계(배리어)가 있는 반면, 환율이 올라갈 때의 손실은 무한대인데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게 피해 기업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키코 계약의 구조가 불공정하거나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고 착오나 기망(사기)에 의한 계약이라는 기업의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에스앤제이인터내셔날이 외환은행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에서 “외환은행이 에스앤제이와 계약을 하면서 고객 보호 의무를 위반한 점이 인정된다”며 에스앤제이에 1억원을 지급하도록 판결했다. 재판부는 “금융기관이 첨단금융공학 기법이 활용된 통화옵션상품을 수출기업에 권유 판매함에 있어서는 이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성을 설명함으로써 수출기업이 합리적인 판단과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고객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은행의 불완전판매 여부를 개별 사례별로 판단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재판부는 이번 소송에 참여한 118개 기업 가운데 19곳에 대해서는 은행의 손해배상 책임을 일부 인정했지만 99곳의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금융 약자 보호 숙제 남겨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키코가 환변동의 차익을 추구하는 투기적 상품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명시하면서도 증권이나 각종 파생상품에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이른바 ‘투자(투기)의 자기 책임’ 원칙을 재확인했다. 계약 체결 이후 상황의 변화만을 이유로 계약상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시장경제질서에 반하는 것이라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그러나 피해 기업들은 키코가 환위험 회피 상품인 줄 알고 가입한 것이기 때문에 투자 혹은 투기가 아니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땀흘려 번 수출 대금으로 환투기를 할 기업이 어디 있느냐는 주장이다. 복잡한 파생금융상품 거래 과정에서 정보가 취약한 중소기업들에 전적인 책임을 물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판결이 공신력을 등에 업은 은행의 투기성 상품 거래를 사후적으로 합리화해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키코 분쟁 이후 키코 같은 환투기 거래는 법으로 금지됐다.
은행들이 고객용 가격표를 별도로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제로코스트 상품’ 논란에서도 법원은 은행 쪽 논리를 수용했다. 재판부는 “제로코스트의 의미는 원피고가 주고받은 옵션의 이론가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옵션의 이론가에 관련 비용 및 마진이 반영된 옵션의 대고객 가격이 동일하여 추가적으로 주고받는 수수료가 없다는 의미라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은행도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인 이상 통화옵션계약을 구성하는 각 옵션가격에 각종 비용 및 영업이익 등이 포함된 수수료를 반영하는 게 당연하다는 판결이다. 그러나 피해 기업들은 “은행 영업직원들이 키코를 판매할 때 이렇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키코 관련 피해 기업들은 재판이 끝난 뒤 기자회견과 항의 집회를 열어 거세게 반발했다.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성명서를 내어 “금융사기의 실체를 파헤치고 단죄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동시에 사실관계 왜곡까지 묵인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과 허탈감을 감출 수 없다”며 “조속한 검찰 수사로 금융사기의 전모를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대위는 이번 판결에 대한 항소와 함께 파생금융상품 거래의 위험과 금융권의 부당행위를 알리는 여론전을 펼치기로 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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