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 “총수일가 ‘적통성 경쟁’ 위해 주주이익은 무시”
외환은행 팔려고 ‘졸속매각’ 주도한 론스타 책임론도
외환은행 팔려고 ‘졸속매각’ 주도한 론스타 책임론도
현대건설 인수전이 사상 최악의 이전투구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인수전 초반부터 서로 적통성을 주장해온 현대그룹과 현대기아자동차그룹간 갈등이 과열되면서 끝내 법정 다툼으로 번진 데 이어 공정성을 유지해야 할 채권단까지 공방전에 휩쓸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싼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의 진흙탕 싸움은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 계열사와 소액주주의 이익을 거리낌없이 희생시키는 후진적 지배구조와 경영관행이 부른 기이한 현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끝없이 계속되는 ‘육박전’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은 2일에도 가처분 신청과 보도자료 등을 통해 서로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현대그룹은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이의제기 금지와 허위사실 유포 등 명예·신용 훼손행위 금지, 주식매매계약 체결 방해행위 금지 등을 요구하는 가처분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현대그룹은 “현대차그룹이 외환은행 예금을 일방적으로 인출하고, 현대그룹의 재무적 투자자인 동양종합금융증권에 거래 단절을 위협하는 압력을 가한 게 사실이라면 이는 입찰 방해행위에 해당된다”며 “현대차는 이런 행위를 당장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현대차그룹은 보도자료를 통해 외환은행을 다시 한 번 압박하고 나섰다. 현대차그룹은 “외환은행이 현대그룹에 1차 자료제출 시한인 12월7일 이후 재차 5일간의 유예기간을 더 주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며 “이는 법률과 대법원 판례에 위반되는 불법조처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밝혔다. 이어 “현대그룹이 대출계약서를 포함한 서류를 제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라며 “현대그룹이 논란의 대출금이 예치된 프랑스 나틱시스 은행과 모종의 ‘입 맞추기’를 준비하기 위해 시간벌이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외환은행이 현대그룹의 ‘입 맞추기’에 적극 조력한 것이라는 법적 책임 문제까지 발생할 수 있음을 외환은행은 명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 총수일가 대리전에 계열사·소액주주 피해 우려 혼탁의 근본 배경에는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이 순수한 경영적인 판단에 의해 현대건설 인수를 추진했다기보다 총수 일가의 경영권 방어와 3대 세습 등 경영외적 판단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시장에서는 보고 있다. 여기에 두 그룹의 자존심이 걸리고 인수가격이 높아지면서 이후 감정 싸움과 법적 다툼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졌다.
그러나 이번 다툼의 피해는 계열사와 소액주주 등 기업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자들에게 전가될 공산이 크다. 현대건설의 주가는 그동안 주당 7만~8만원대를 유지했으나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뒤 5만원대로 주저앉았다. 현대그룹이 인수할 경우 현대건설 자금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시장의 우려 탓이다.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증권 등 주요 계열사들은 유상증자와 회사채 발행, 담보 제공 등 과도한 부담을 지게 되면서 주가가 크게 출렁이고 있다.
현대차 역시 주가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동차업황이 좋은데도 현대차는 현대건설 인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주가가 오르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증시분석가들은 보고 있다. 만약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주가 하락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선웅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소장은 “현대건설 인수전이 현대차그룹에 유리하게 진행되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미국 자동차 업체들일 것”이라며 “현대차가 현대건설 인수에 5조원을 쏟아붓게 되면 미국시장 공략 등에 있어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은 지난 1일 “한국 기업들의 족벌 경영과 소액주주들을 무시하는 경향, 기업 지배구조 문제 등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한 원인”이라고 꼬집은 뒤, 현대건설 인수전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이 신문은 “상황은 서로에 대한 비난과 소송 위협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번 인수전이 단지 적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족벌 구성원 간의 경쟁일 뿐이라는 시각을 강화시키고 있다”며 “소액주주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졸속매각한 대가” 사태를 꼬이게 한 핵심 이유 중 하나를 외환은행의 대주주인 론스타에게서 찾는 시각도 있다. 빨리 이익을 실현하고 철수하려는 론스타가 졸속 매각을 주도하면서 문제가 커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외환위기 이후 공적자금을 투입해 살린 은행을 서둘러 외국 자본에 매각한 후유증을 뒤늦게 겪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여기에 하나금융이 외환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나서고, 외환은행 직원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금융권은 혼란에 빠져 있는 상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무역학)는 “지난 2003년 시중은행의 대주주가 될 자격이 없으며, 은행업을 본업으로 삼을 의지도 없는 사모펀드에 외환은행을 매각한 결과, 국민경제 전체가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금융감독 당국은 론스타의 산업자본 여부부터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성 정혁준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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