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발효 뒤 ISD 재논의’는 폐기 재협상과 달라
미국 행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후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투자자-국가소송제를 폐기하는 재협상을 하겠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통상교섭권을 의회가 쥐고 있는데다 행정부에 통상교섭을 위임하는 ‘무역촉진권한’(TPA)의 시한이 이미 만료됐기 때문이다. 미국 행정부가 재협상을 추진할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앞서 지난해 12월 자동차 분야 재협상 때도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미국 의회와 협상 내용을 수시로 공유하며 함께 최종 협상안을 도출해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된 뒤 협정을 개정하려면 미국 의회가 최종적으로 승인해야 한다. 협정 발효 후 한반도역외가공위원회를 열어 개성공단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조차 미국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일이다. 따라서 협정 발효 뒤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폐기하려면 미국 의회의 승인 절차를 밟는 것은 물론이고 사전 조율도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투자자-국가 소송제에 대한 논의가 아예 가로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한-미 협정 22.2조3항은 두 나라의 통상대표로 구성된 공동위원회가 ‘협정의 개정을 검토하거나 협정상의 약속을 수정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지난달 30일 합의서한을 교환해 공동위원회 산하에 서비스·투자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합의서안에는 ‘서비스·투자위원회는 협정의 발효 후 90일 이내에 첫 번째 회의를 개최한다. 위원회는 어느 한쪽 당사국에 의해 제기되는 어떠한 특정 이슈도 다룬다’고 적혀 있다. 우리 정부가 요청하기만 하면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물론 어떤 주제도 서비스·투자위원회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 행정부가 이날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립서비스’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미국 쪽이 협의 테이블에 앉는 것과 투자자-국가 소송제 폐기에 합의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협정이 발효된 뒤 미국이 일방적으로 우리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투자자-국가 소송제 폐기와 맞바꿀 새로운 요구를 미국이 내놓을 가능성이 되레 높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이는 격이 된다면 우리 정부는 ‘없던 일’로 선언할 명분만 얻는다.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 정부에 투자자-국가 소송제 재협상 여부를 타진해보니 ‘노(No)’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고 전한 바 있다.
한-미 두 나라가 투자자-국가 소송제에 합의하더라도 협정을 개정하려면 새로운 조약을 맺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협정문 24.2조(협정의 개정)에 따르면, 두 나라는 서면으로 협정의 개정에 합의하고 법적 요건과 절차를 밟아 발효해야 한다. 미국 의회는 물론 우리 국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투자자-국가 소송제 조항이 들어가 있는 상태로 한-미 협정가 발효된 후, 이를 빼내기 위해 새로운 협상을 시작하겠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며“한-미 협정문에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국회의 비준동의 전에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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