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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금융위기시대, 은행 덩치 줄이고 공공성 키워라

등록 2012-06-17 20:36

[진단과 전망] 고장난 금융산업 대안은
기업들 차입 줄이자 서민주택대출 등에 ‘이자 빨대꽂기’
한해 당기순익 15조원…‘빚내서 소비’ 부추겨 경제파탄
스페인도 은행이 화근이었다. 2007년까지만 해도 건실한 성장과 건전한 재정을 자랑하던 스페인 경제는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청년 두명 중 한명이 실업자일 정도로 침체의 나락에 떨어졌다. 스페인의 부동산 가격은 1997년부터 2007년까지 3배 이상 올랐다. 이를 떠받친 것은 4000억유로(약 588조원)에 이르는 은행의 부동산 담보대출이었고, 이 가운데 약 1800억유로가 부실화됐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과 같은 ‘판박이 위기’가 시간과 장소를 바꿔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세계는 고장난 금융 시스템을 어떻게 수리할지 고민해 왔다. 감독당국과 경제학자들이 붙잡고 씨름한 질문은 “왜 대형은행들이 과도하게 리스크를 떠안아 결국 사고를 내는가?”였다. 600여명의 유럽권 경제학자가 속해 있는 연구네트워크 유럽경제정책연구센터(CEPR)가 최근에 낸 보고서는 4가지 문제 의식 아래 대응책을 모색해 왔음을 보여준다.

첫째, 은행의 지배구조에 관한 것으로, 경영자에 대한 과도한 보너스 약속, 주가의 단기 등락에 민감한 경영, 예금자 등 이해관계자보다는 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영이 불러들인 위험 감수 경향이다. 둘째, 대출의 ‘경기 순응성’(procyclicality)에 대한 것으로, 경기가 좋을 때는 대출세일을 벌이다 침체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회수에 나서 경기 변동성을 키우고 부실이 늘어나게 되는 체계적인 위험이다. 셋째, 투명성의 결여로 ‘시장에 정보가 가장 필요할 때 정보를 가장 감추고 싶어하는 역설’이 빚어짐으로써 투명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시장 규율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다. 넷째는 ‘대마불사’의 도덕적인 해이로, 부실이 커졌을 때 당국이 구제해 줄 것이란 암묵적인 믿음이 경영진과 주주를 용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러 대응책이 마련됐고 일부는 시행에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규제들이 다음번 금융위기를 막아낼 것이란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빈틈이 많은 규제마저 빈껍데기로 만들려는 금융계의 로비도 문제지만, 최근 수십년 동안 규제는 금융위기의 뒷북을 쳐왔다는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은행이 대형사고를 내는 게 규제가 부족해서도, 은행원이 남달리 탐욕스러워서도 아니라는 생각을 할 때가 됐다. 바로 그렇게 만드는 구조적인 요인에 눈을 둘려야 하는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란 부채로 먹고사는 선진국형 경제를 말한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제조업 기반의 성장이 한계에 이르자 금융산업을 새로운 수익원으로 삼아 지난 20~30년을 살아왔다. 은행들로선 대형화로 비용을 줄이고, 상업적인 경영으로 이윤을 높이려 드는 게 필연적이다.

원론적으로는 금리를 낮추면 기업의 투자심리가 살아나고 창업도 활발해져 경기가 회복되야 하지만, 글로벌 산업 구도상 선진국에서 이런 기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한번은 주식으로 돈이 몰려 거품을 일으키고, 다음은 부동산으로 몰려 경제에 타격을 주는 일이 반복되어 온 것이다.

한국의 은행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정은 비슷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의 체질은 크게 달라졌다. 부실과 관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형화와 수익성이 경영의 화두가 됐다. “이제 금융기관이 아니라 금융회사로 불러달라”며 상업성으로 재무장한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 등 가계대출을 새로운 수익원으로 발굴해 냈다. 자본시장이 개방되자 대기업은 은행 의존을 줄이고 국내외 주식·채권시장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2~2007년 사이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것은 저금리 기조 아래 가계로 돈을 밀어낸 은행들의 공격적인 소매금융 확대 전략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이렇게 늘어난 가계대출이 현재 1000조원에 육박한다. 이가운데 300조원 이상의 부동산 담보대출을 포함해 예금은행의 가계대출 규모가 약 455조원(4월말 기준)에 이른다. 빚에 눌린 가계는 이자를 내느라 소비할 여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정부의 진입 규제와 암묵적으로 보장하는 예대마진에 기대 영업을 하는 은행들은 지난 10년간 깔아놓은 가계대출에 빨대를 꽂고 1년에 12조~15조원에 이르는 당기순이익을 내고 있다. 가계의 여유자금을 산업자금으로 연결해 주는 은행 고유의 기능은 사라졌다. 대신 기업의 넘쳐나는 자금과 시장성 수신을 받아 저축률이 제로에 가깝게 떨어진 가계에 대주고 돈을 버는 게 은행의 일이 됐다.

이런 점에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은행은 축소해야 한다. 부채의 성을 쌓아올려 소비를 촉진하는 방식이 파탄에 이른 마당에 은행이 커야 할 이유는 없다. 관료조직이 생존을 위해 일을 만들어 내듯, 대형화한 은행은 수익을 위해 돈을 밀어내고 또 다른 부실을 키우게 돼 있다. 자산의 규모가 가계의 고통 지수와 같은데, 이미 400조원 규모에 근접할 정도로 커진 은행들의 키재기는 허망한 일이다. 또 관료들의 여전한 ‘메가뱅크’(초대형 은행) 타령은 시대착오의 느낌을 준다. 이제 덩치는 작아지고 공공성은 커진 은행이 필요하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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