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대전시 유성구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행복한 삶: 경제적 가치를 넘어’ 국제콘퍼런스에서 참석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대표, 카르마 치팀 위원장, 박진도 원장, 야마우치 나오토 위원장, 고승희 책임연구원. 충남발전연구원 제공
한겨레경제연·충남발전연
국제콘퍼런스
‘행복한 삶 : 경제적 가치를 넘어’
국제콘퍼런스
‘행복한 삶 : 경제적 가치를 넘어’
우리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서 있질 못하고 타박타박 걸어 올라간다. 편하자고 만든 걸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는 건 마음의 ‘속도계’가 조급하게 길들어진 때문이리라.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꿈꾸지만 속도와 욕망을 끝없이 자극하는 세상에서 행복은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충남발전연구원(원장 박진도)과 한겨레경제연구소는 ‘행복한 삶: 경제적 가치를 넘어’를 주제로 행복의 조건을 찾아보는 국제콘퍼런스를 지난달 30일 대전에서 열었다. 토론회에는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원제: Ancient Futures)로 잘 알려진 행복경제학의 전도사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생태와 문화를 위한 국제협회(ISEC) 대표, 부유하지 않아도 국민의 행복도가 높은 나라 부탄의 국민총행복위원회(GNHC) 카르마 치팀 위원장, 삶의 질 연구의 권위자로 일본 내각부 소속 웰빙측정위원회 야마우치 나오토 위원장, 고승희 충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이 참석했다.
행복으로 가는 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대표
“물질적 성장은 고립과 불안 높여
서구 도시문화 노출된 주민들
열등감 느끼며 불행하기 시작
지역화가 경제·환경 공생방도 ” 야마우치 나오토 위원장 “중류사회 붕괴가 일본 불행 시작
소득격차 커지며 빈곤층은 물론
소득상위계층도 불행하다 느껴
행복 가꾸려면 각종 격차 줄여야” 카르마 치팀 위원장 “전통계승도 행복의 밑거름
행복하려면 자존감 필요한데
이는 문화에서 나오는 것
가족·이웃 위해 시간 써야”
올 한해 우리 사회를 잘 보여준 ‘열쇳말’을 꼽아본다면 ‘피로사회’도 포함될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가 쓴 <피로사회>는 올 3월 출판된 지 한 달 반 만에 철학책으로는 이례적으로 1만5000부가 팔려나갔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가 살기 피로하다고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뿐 아니다. 지난 30여년간 시장의 원리가 세계화, 개방화, 민영화의 깃발 아래 우리 삶의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시장의 미덕인 ‘무한경쟁’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끝없이 ‘자기계발’로 내달렸다. 그런데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1 대 99의 격차, 불안정한 일자리, 금융-재정위기와 함께 극도로 피곤하고 우울해진 우리 모습이다. 미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우울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방에 박혀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젊은이들이 늘어만 간다.
이 콘퍼런스에서 토론자들이 한목소리로 강조한 행복의 조건은 물질과 정신적 만족의 조화다. 경제성장으로 소득이 늘어나는 것도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스털린의 역설’이란 이론은 물질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소득이 늘어도 행복이 같이 늘어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대략 분수령이 되는 소득수준이 1인당 2만7000달러 정도라 하니, 한국이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야마우치 위원장은 “1980년 초에 일본인의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가장 높았으나 그 뒤로 1인당 국민소득(GDP)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음에도 체감하는 행복은 감소하거나 정체했다”며 “조사를 해 보면 행복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건강, 가정, 소득, 정신적 휴식, 친구, 일, 자유시간의 순이어서, 경제적 측면 못지않게 비경제적 요인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안정감은 행복과 직결되는 정신적 만족이다. 사람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이 잘 잡혀 있고 스스로에 대해 만족할수록 안정적이며, 오히려 독립적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과의 폭넓은 유대감이 중요할 뿐 아니라 자연과도 연결돼 있다는 걸 느끼며 살아야 한다고 토론회에 모인 행복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매진하는 물질적 성장은 행복보다는 오히려 고립과 불안을 높인다. 노르베리호지 대표가 <오래된 미래>에서 묘사한 40년 전 티베트 고원의 작은 마을 라다크는 처음에는 “자부심이 확고하고 강건”하며 “미소가 입 주위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1975년 이후 서구의 세련된 도시문화에 노출되면서 자신들의 음식, 의복, 집 그리고 언어까지 비교를 하고 열등하다 느끼며 불행해하기 시작한다.
노르베리호지 대표는 글로벌 소비 문화 아래서 모두가 이런 심리적 압박의 희생자라고 밝힌다. 세계 어디를 가나 정상 체형의 여성조차 자신의 외모에 불안감을 느껴 죽음을 무릅쓴 단식을 감행한다. 아시아의 여성들은 서양인 비슷하게 성형수술을 하는 게 유행이다. 노르베리호지 대표는 “현실에서 소비는 더 극심한 경쟁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키고, 아이들은 더 고립되고 불안해하며 불행해진다. 그래서 더 미친 듯 소비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유대감 속에서 행복을 가꾸려면 우선 소득, 지위, 기회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 위화감이 큰 곳에서 배려와 공감이 자라나기 어렵다. 야마우치 위원장은 일본이 1980년대 이후 빈부격차가 확대되며 ‘1억 총 중류사회’가 붕괴된 게 오늘날 일본 사회의 우울함을 만들었다고 진단한다. 그는 “소득격차가 벌어지면서 빈곤하다 느끼는 사람이 먼저 불행해졌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소득 상위계층 역시 불행하다고 느끼게 됐다는 것”이라며 “소득격차가 확대되면서 모두 불행해졌다”고 말한다.
서구화의 ‘쓰나미’에 쓸려가지 않고 전통을 계승해 문화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도 행복의 밑거름이 된다. 부탄의 치팀 위원장은 “행복하려면 자존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깊이 내려가면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수천년간 전승된 부탄인으로서의 애정, 공경, 부모에 대한 태도 같은 게 자아의 바탕이 된다”고 말한다.
부탄은 ‘대가족’을 이런 전통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가장 기본적인 ‘제도’로 보고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해체되지 않도록 정책적 노력을 기울인다. 치팀 위원장은 “가족, 이웃, 동료와 함께하기 위해 가장 가치있는 자원인 시간을 써야 한다”며 “하루를 3분해 적어도 8시간을 가족이나 공동체와 보내고 기부나 명상을 통해 활력을 얻도록 하는 게 부탄의 행복정책”이라 말한다.
하지만 지구화한 생산과 소비는 우리를 끊임없이 공동체에서 분리하는 강력한 원심력이다. 이런 힘에 대항하는 구심의 에너지가 필요한 데 노르베리호지 대표는 이를 지역화에서 찾는다. 그녀는 지역화란 “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가능한 한 줄이고 기본적인 필요를 가까운 곳에서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녀는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는 소비자는 슈퍼마켓 소비자보다 열배나 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며 지역공동체와 지역경제를 강화하는 것이 심리적, 사회적, 환경적 안정을 이루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밝힌다. 그렇다고 국제무역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기업들이 어느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에 소속돼 그 사회의 규칙을 따르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물론 이런 노력이 쉬운 일은 아니다. 박진도 충남발전연구원장은 “충남이 추구하는 ‘내발적 발전’은 기본적으로 지역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성장제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주민들은 행복이나 공동체적 가치, 환경적 가치를 고려하자고 하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비판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노르베리호지 대표는 이에 대해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가 문제라는 생각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며 “성장제일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런 성장이 사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지역화가 경제와 환경이 동시에 사는 길이란 것을 납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bhlee@hani.co.kr
행복을 정책결정 잣대로 삼는 리더십 필요 GDP 대체하는 다양한 행복지수들 석학들 모여 ‘행복지수’ 개발 시도
일본 국민 ‘웰빙 측정’ 정책 반영
충청남도서 행복지수지표 개발중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우리의 물질적 삶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지표다. 하지만 지디피 성장률은 우리의 행복을 측정하는 도구가 되기에는 아주 둔탁한 잣대다. 태풍이 휩쓸어 한 도시가 쑥대밭이 됐을 때 집을 새로 짓고 끊긴 도로를 복구하면 지디피 성장률은 올라간다. 이처럼 성장률이 높아지는 과정에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나 환경오염, 자원고갈 같은 외부효과를 지디피는 계산하지 않는다.
이런 지디피의 결점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가깝게는 2008년 경제위기가 일어나자 프랑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후원으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 장폴 피투시 등의 석학이 모여 지디피를 대체할 ‘행복지수’ 개발을 시도한 것이 예이다. 이 작업은 란 책으로 국내에도 소개가 됐다.
히말라야 산중에 있는 인구 60만명의 작은 나라 부탄은 40여년 전부터 국민의 행복을 측정하는 독자적인 지표 개발을 추진했다. 2008년에는 이렇게 만든 지표로 국민총행복(GNH)을 측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책을 수립·집행하고 있다. 부탄의 지엔에이치 지표는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사회 및 경제적 발전’, ‘문화 보존 및 진흥’, ‘환경보호’, ‘굿 거버넌스’(활기찬 민주문화를 말함) 등 4개 축을 중심으로 해서 9개 부문 33개 지표로 이루어져 있다. 2년에 한번 지엔에이치 지수를 측정하는데, 2010년 측정된 지수는 1점 만점에 0.743으로 건강, 생태학적 다양성, 공동체, 문화 등은 우수하게 나온 반면 교육과 거버넌스는 그렇지 않아 이쪽에 정책 역량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
부탄 정부는 어떤 정책을 입안할 때 국민총행복 평가를 실시해 시행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치팀 위원장은 “외국자본이 투자를 제안해도 곧바로 승인하지 않는다. 국민총행복위원회를 열어 개인, 지역,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을 평가 한 뒤에야 개방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20~30대 3명 가운데 1명이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고, ‘외롭다’고 답하는 15살 학생의 비율이 선진국 중 가장 높게 나오는 등 사회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이에 따라 2009년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국민의 웰빙을 측정해 이를 국가정책에 반영하기로 결정했고 2010년 말 내각에 행복 문제 전문가를 중심으로 웰빙측정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가 만든 웰빙 지표는 지속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사회경제적 조건, 건강, 관계성 등 객관적 지표를 측정하는 한편 행복감 등 주관적 웰빙도 측정을 한다. 야마우치 위원장은 “최근 선거철에 일부 현의 지사가 자기 지역을 행복 수준이 가장 높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했다. 앞으로는 행복을 정책 결정의 잣대로 삼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내에서는 충청남도가 행복을 정책 수행의 잣대로 삼기 위해 충남발전연구원(충발연)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충발연은 행복지수를 산정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하고, 도민들을 설문 조사해 조사의 영역과 지표를 개발하고 있다. 지표 안에는 교육, 환경, 문화 및 여가, 건강 및 보건, 가족 및 공동체, 일자리 및 소비, 주민 참여 외에도 삶의 만족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같은 주관적 행복 영역도 포함된다.
박진도 원장은 이런 행복지표를 개발하는 것은 충남이 추진하는 ‘내발적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며 “내발적 발전은 지역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로서 세계와 관계 맺기에 나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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