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19일 한진그룹은 계열사가 보유중인 에쓰오일 지분을 파는 등 3조5천억원의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자구계획을 발표했다. 나흘 뒤 현대그룹도 3조3천억원 규모의 자구계획을 발표했다. 현대증권을 비롯한 금융사를 매각해 금융업에서 철수하고, 현대상선의 사업부문을 매각하겠다는 게 뼈대였다.
두 그룹을 어려움에 빠뜨린 것은 해운업체의 엄청난 적자다. 국내 1·2위 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최근 3년간 누적 적자 규모는 각각 2조원을 넘는다. 한진해운은 지난해 6801억원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2011년부터 3년간 낸 누적손실이 모두 2조1420억원에 이르렀다. 현대상선도 지난해 5858억원 등 3년간 적자 누적액이 2조579억원이나 된다. 올해도 두 회사는 1분기에 각각 622억원, 617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최근 몇년 사이 한국 해운이 이처럼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 원인에 대해 해운 전문가들은 세계적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면서 해운물동량 자체가 격감한 상황을 꼽고 있다. 지난 2008년 9월 미국 리먼브러더스 파산 등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세계적 경기침체 탓이 크다는 것이다. 물동량 자체가 격감한 가운데 선박 공급 과잉에 따른 운임 하락이 가파르게 이어진 것이 경영난을 가중시켰다. 글로벌 경기의 선행지표로 활용되는 발틱운임지수(BDI)는 호황기인 지난 2008년 5월 1만1783을 기록한 뒤 같은해 12월 무려 672까지 급락했으며 지금도 1000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1·2위 선사 한진해운·현대상선
3년 쌓인 적자 각각 2조원대
공급과잉에 가파른 운임하락
난국 돌파할 뾰족수 안보여
순환출자탓 그룹전체 수렁에
각사의 경영판단 실패 등 내부적 요인이 더 큰 화를 불렀다는 분석도 많다. 대부분의 세계 해운사는 불황기에 가격이 떨어진 선박을 적극 사들여 호황기에 선단을 운영하는 전략을 펼친다. 하지만 한국 선사들은 정반대로 갔다. 특히 조수호 전 회장이 타계한 뒤 한진해운은 장기 업황을 고려하지 않고 호황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2009년 말 69척에 불과했던 선박을 2013년 104척까지 크게 늘렸다.
해운업 업황이 회복되지 않는 상황에서 국내 해운업체들이 난국을 돌파할 뾰족수는 보이지 않는다. 강성진 케이비(K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운임이 계속 하락하는 것은 해운사간 경쟁상황이 빚어낸 결과”라며“원가절감에 성공하면서 흑자로 전환한 머스커 등 세계 1~3위 선사들이 굳이 운임을 올리기보다는 낮춰서라도 화물을 더 확보하려는 태세여서 운임 인상에 대한 공감대가 사라진 상태”라고 분석했다. 세계 1위 컨테이너 해운업체인 덴마크의 머스커는 해운 불황기에도 2012년 2분기부터 흑자전환에 성공한 뒤 최근 3~4분기 동안 호황기에 버금가는 많은 이익을 내고 있다.
국내 해운업계에서 특히 부각되는 문제는 장기간에 걸친 각 업체의 경영난이 그룹 전체의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한진해운은 3월초 1800억원을 비롯해 올해 연말까지 모두 3900억원의 회사채를 막아야 한다. 현대상선은 회사채 4200억원, 기업어음(CP) 4000억원 등 올해 갚아야 할 빚만 8200억원이다. 두 회사 모두 자본력이 취약하고 재무구조는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태다. 김봉균 한국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지난 3일 낸 보고서에서 “두 그룹이 그동안 자산 매각을 통해 자구노력을 했지만 실제 현금 유입 규모와 영업실적 회복 지연을 감안하면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는 현대글로벌-로지스틱스-엘리베이터-상선-현대글로벌로 이어지는 순환출자로 돼 있어 상선의 재무위험이 그룹 전체로 퍼지기 쉬운 구조다. 현대는 지배주주인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 강화를 위해 계열사 현대엘리베이터를 동원해 파생상품계약을 유지해왔다. 현대엘리베이터가 파생상품 계약 상대방이 취득한 현대상선 주식의 의결권을 양도받는 대신, 현대상선 주가가 하락하면 계약 상대방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구조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이로 인해 엘리베이터가 지는 평가손이 40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최대주주의 경영권 지키기에 동원되면서 계열사들이 함께 수렁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한진그룹의 대한항공도 한진해운 유상증자에 4000억원을 투입하는 등 올 들어 본격적인 지원에 나서면서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등 불똥이 번지고 있다.
최익림 정남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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