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미국 연방대법원 앞에서 나이지리아인들이 로열더치셸의 인권유린에 대한 유죄 판결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일체인지인터내셔널 제공
이제는 인권 경영 시대
2014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단어 중 하나는 ‘인권’이다. 자본의 이기심과 무책임한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이 초래한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의 적법 판결, 서울시민 인권헌장 무산 논란까지, 모든 이슈의 중심에 인권 문제가 놓여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국제사회에서는 인권 이슈, 특히 기업의 ‘인권 경영’에 대한 논의가 폭넓고 빠르게 진행 중이다. 인권 경영이란 기업이 가치사슬 안에서 사람을 중시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경영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노동자 권리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는 과거에도 많았지만, 기업 활동과 인권을 직접 연결시키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영국, 인권 이행 국가행동계획 마련
‘기업과 인권’에 대한 기준과 포괄적 권고사항이 포함된 유엔의 이행지침(UNGP)이 유엔 인권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채택된 2011년 이후 유럽국가를 중심으로 구체적이고 전향적인 조처들이 잇따르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경우 2013년 유엔의 이행지침을 수행하기 위한 국가행동계획(NAP: National Action Plan)을 마련해 국가적 차원에서 인권 경영을 추동하고 있다. 모든 정부기관과 국내 기업뿐 아니라, 영국에 사무소를 둔 외국 기업들도 국가행동계획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 영국에 이어 네덜란드, 이탈리아, 덴마크가 유엔의 이행지침을 도입한 국가행동계획을 내놨다. 특히 올해 6월 덴마크 국가인권위원회와 국제기업책임원탁회의(ICAR)는 각국이 국가행동계획을 설립하고 운영하기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툴킷)을 개발해 배포했다.
준법 경영만으로 사회변화 못 따라가
이런 유럽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글로벌 기업들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기업 인권 이슈를 다루는 영국의 연구기관인 기업인권자원 리서치센터에서 발표한 집계(2012년 기준)를 보면, 인권정책강령을 채택한 글로벌 기업 300곳 중 석유·가스 등 에너지 기업이 11.3%로 가장 많았다. 이어 금융업(11%), 금속 채굴·광업(8.6%)이 뒤를 이었다. 일찌감치 저개발국에 진출해 잦은 인권침해 사건에 연루됐던 에너지 기업들이 적극 대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투자회사 바클레이스는 금융권에선 처음으로 유엔의 인권이행지침을 채택한 기업이다. 사업영역 전반에서 인권 영향과 관련된 정책들을 통합한 기본틀을 개발하고 시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웃소싱 경영에 대한 자금을 지원할 때는 공급업체 평가에 인권 기준이 포함되도록 권고하는 식이다. 바클레이스는 영국 런던 생활임금 운동의 후원사이기도 하다. 회사 내 청소 및 배송업체 노동자에게 최저임금보다 높은 시급을 지급하는 한편, 병가와 휴일 보장, 인센티브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인권 경영이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른바 ‘준법 경영’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다. 법과 제도의 변화는 사회 변화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흐름에 맞지 않는 법 규범이 존속하거나 이해관계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독재국가나 권위주의적인 국가일수록 다양한 사회 흐름을 반영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법과 제도를 기대하는 건 더욱 어렵다. ‘법만 지키면 된다’는 소극적인 준법 경영의 한계를 넘어선 대안으로 인권 경영이 제기되는 이유다.
둘째, 사적 주체가 아닌 공적 주체로 변화하는 기업의 사회적 지위다. 현대의 기업은 다양한 사회조직 및 개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있다. 주주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존의 경영 활동으론 지속가능하지 않다. 기업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기업에 대한 각종 규범과 통제 또한 확대되는 추세다.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와 사회책임경영 정보를 의무화하는 나라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커지는 기업 영향력 맞게 규범 지켜야
마지막으로 다국적기업의 인권침해 확산 문제다. 글로벌 석유기업 로열더치셸은 2007년부터 3년간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무장 범죄조직에 3억8000여만달러를 제공한 사실이 밝혀져 곤욕을 치르고 있다. 회사의 자산과 직원을 보호하기 위한 명목 아래 민간인 살해 등 전쟁범죄에 연루된 정부군에 대규모 재정지원을 해온 것이다. 로열더치셸은 나이지리아 법과 규범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다국적기업의 지속적인 인권침해에 대한 해법으로 인권 규범의 강제성에 주목하고 있다. 기업에 사회적인 책임을 권하는 것에 앞서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할 의무를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 경영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도 없진 않다. 인간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강한 규범성과 강제성을 띠기 때문에 보수적인 정부나 기업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게 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권 경영 이슈가 계층 갈등과 빈곤 심화, 지역간 불균형 등 전지구적인 문제의 해법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논의는 한층 더 강화될 전망이다.
박은경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원 ek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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