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권오현 이사회 의장(대표이사 부회장)이 3월11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주총은 송광수 전 검찰총장(재선임)과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신규)의 사외이사 선임 안건에 일부 주주가 반발하면서 이례적인 표대결이 벌어졌다. 이 바람에 주총은 3시간 넘게 진행됐고, 선임 안건은 결국 원안대로 통과됐다. 연합뉴스
[싱크탱크 광장] 올해 5대 그룹 상장사 사외이사 분석
1년 전 대한민국 관료사회를 술렁이게 만든 두 개의 법률이 제정됐다.
지난해 3월27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이 공포됐다. 이 법률이 본격 시행되는 올해 9월부터는 공직자뿐만 아니라 기자 등 언론 종사자, 사립학교·유치원 임직원, 사학재단 이사장·이사에 이르기까지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에 상관없이 본인이나 배우자가 100만원을 넘는 금품 또는 향응을 받으면 형사처분을 받게 된다.
그 며칠 뒤에는 세월호 사태 이후 ‘관피아’를 막기 위해 논의되기 시작한 공직자윤리법 시행령 개정안이 본격 시행됐다. 퇴직 공무원의 취업 제한 기간을 3년으로 1년 늘리고, 취업 제한 기관도 1만5033곳으로 확대했다. 퇴직 관료들이 상장사 사외이사로 취임하기 전에 관례처럼 들렀던 법무법인·세무법인·사립대학(교수 제외) 등도 포함됐다. 현직 관료와 퇴직 관료를 가리지 않고, 향후 두 법안이 자신들에게 끼칠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 두 법안을 둘러싼 관료사회의 의견은 엇갈렸다. 기업 로비가 쉽지 않아졌으므로 기업들이 더 이상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선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부류는 이미 기업 사외이사로 ‘막차’를 탄 선배 및 동료 관료에게 한없이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반면, 금품 수수·청탁 등 기존 로비 관행이 위축돼 기업들이 오히려 퇴직 관료, 즉 ‘사람’을 통한 연결고리에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짐작한 이들도 있었다. 머지않아 퇴직 관료 대거 영입이라는 ‘큰 장’이 설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은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 누구의 생각이 맞았을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올해 5대 그룹 상장사가 주주총회에서 신규 선임 및 재선임한 사외이사(총 91명) 중에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조사해보니 38.46%로 나타났다.
출신 분류는 한 사람이 관료·학계·법조 등 두 가지 이상의 경력을 거쳤을 경우 재직 기간이 가장 긴 분야를 출신지로 파악했다.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삼성전자), 최석영 전 제네바 국제기구 대표부 대사(롯데쇼핑), 유재한 전 정책금융공사 사장(이노션) 등 35명이 퇴직 관료다.
2014년 5대 그룹 상장사가 주총에서 신규·재선임한 사외이사(총 93명) 중 관료 출신 비율 27.96%(26명)에 견줘 크게 늘었다. 학계·관료와 함께 사외이사 ‘삼두마차’로 불리던 법조인 비율은 2014년 12.9%(12명)를 정점으로 계속 감소하고 있다. 올해 5대 그룹 상장사 주총에서 신규 또는 재선임된 법조인 사외이사 비율은 9%(8명)에 그쳤다.
5대 그룹 사외이사 열 중 넷 관료출신
법무·기재 장관·서울국세청장 등 포진
전년 28%에 견줘 10.5% 증가
재벌 ‘문제 해결’ 창구로 활용 가능성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제와 관련 추측
롯데도 정부 인허가 사업 겨냥 의심
사외이사 ‘겸직’ 현상도 크게 늘어나
“사외이사 역할 규정 제도 강화해야”
김영란법 시행에 따른 관료 출신 사외이사 변화상을 좀더 자세히 파악하려면 신규 선임 사외이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올해 5대 그룹 상장사가 신규 선임한 관료 출신 사외이사는 문경태 전 보건복지부 정책홍보관리실장(삼성증권), 김영기 전 국세청 조사국장(현대건설), 안영호 전 공정거래위원회 기획조정관(엘지화학) 등 19명이다. 전체 신규 사외이사(42명)의 약 40%에 달한다. 비율은 현대차그룹이 80%(5명 중 4명)로 가장 높고, 인원수로는 삼성그룹과 롯데그룹이 각각 7명으로 많았다. 반면, 엘지그룹은 신규 선임 사외이사 9명 중 관료 출신은 1명뿐이었고, 에스케이그룹은 관료 출신을 한 명도 신규 선임하지 않았다.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늘어난 배경은 뭘까? 우선, 삼성과 롯데 쪽을 보면 개별 기업들이 처한 경영 여건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삼성그룹은 올해도 경영권 승계라는 당면 과제가 눈앞에 있다. 이 과제를 해결하려면 때로 정부 부처와 긴밀한 협력이 필요할 수 있다. 지난해 우여곡절 끝에 합병에 성공한 삼성물산 사례만 보더라도 보건복지부 산하 공적기구인 국민연금의 의결권 향방이 관건이었다. 그룹 내 금융지주사 설립도 당장의 현안이다. 지난 1월 삼성전자가 갖고 있던 삼성카드 지분을 삼성생명이 인수하면서 이미 불거진 이슈다. 금융지주사 설립은 현재 논의 중인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가 선행돼야 한다. 현행법은 지주회사가 금융 자회사를 둘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여전히 진행 중인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말끔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고, 정부의 인허가 사업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호텔롯데는 오는 6월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갈 길이 멀다. 상장 예비심사는 통과했지만, 공정위가 연일 호텔롯데의 최대 주주인 일본롯데홀딩스의 지배구조를 더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탈락한 시내 면세점 특허권도 최근 법안 재개정이 논의되고 있는 와중이어서 롯데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롯데가 5대 그룹 중 가장 많은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선임한 배경으로 해석된다.
박기찬 인하대 교수(경영대)는 “일부 그룹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영권 승계 등의 문제는 단기간에 마무리될 일이 아닌 만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관료 출신 사외이사에 대한 재벌 기업들의 선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영란법 등 공직자 취업심사 강화에도 불구하고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대폭 늘어난 또다른 배경으로 꼽히는 것이 있다. 바로 사외이사 ‘겸직’이다.
올해 5대 그룹 상장사가 신규 선임한 관료 출신 사외이사 19명 중 11명이 다른 기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삼성그룹이 주총에서 신규 선임한 7명의 관료 출신 사외이사 중 겸직 퇴직 관료는 문재우 전 손해보험협회 회장(호텔신라·롯데손해보험) 등 5명이다. 롯데그룹이 신규 선임한 관료 출신 사외이사 7명 가운데 채경수 전 서울지방국세청장(롯데칠성·CJ헬로비전) 등 5명이 겸직이다. 현대차그룹에서도 신규 사외이사 4명 중 유재한 전 정책금융공사 사장이 이노션과 삼성중공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은행과 금융지주사를 제외하면 상장사 두 곳까지 사외이사를 맡을 수 있다고 명시한 상법 규정을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공직자윤리법 개정안 시행 이후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등은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미리 대거 영입했다. 올해부터는 관료 출신 사외이사 선임이 어려워질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지난해 주총에서 삼성과 현대차 두 그룹이 신규 선임한 14명의 사외이사 가운데 관료 출신이 6명에 달했다. 전직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출신까지 보태면 8명에 이른다.
관료 출신 사외이사와 ‘겸직’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다. 올해 주총에서 ‘겸직’ 관료 출신 사외이사 중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과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기관투자자로부터 반대표를 받았다. 반대 이유는 ‘사외이사 본연의 독립적인 경영진 견제와 감시 역할’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송민경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위원은 “관료 출신 사외이사와 겸직에 대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다”면서도 “단순히 기업의 대관업무를 맡기기 위해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선임해서는 안 된다. 사외이사의 책임과 권한 범위를 분명히 하는 쪽으로 상법상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재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CSR팀장 jkseo@hani.co.kr
5대 그룹 상장사 사외이사 출신별 비율
법무·기재 장관·서울국세청장 등 포진
전년 28%에 견줘 10.5% 증가
재벌 ‘문제 해결’ 창구로 활용 가능성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제와 관련 추측
롯데도 정부 인허가 사업 겨냥 의심
사외이사 ‘겸직’ 현상도 크게 늘어나
“사외이사 역할 규정 제도 강화해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올해 5대 그룹 상장사가 새로 선임하거나 재선임한 사외이사(총 91명)를 살펴보니 관료출신이 38.46%(35명)로 나타났다. 2014년 주주총회 때의 관료 출신 비율(27.96%·26명)에 견줘 크게 늘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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