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순둥이’
최근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모습에 빗대 일부 언론이 경제 사령탑인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붙인 별명이다. 맥락상 썩 좋은 뜻은 아니다. 일전에 유 부총리를 만나 이런 세간의 인식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사령탑이라는 말이 글쎄…”라며 말을 아끼면서도 개발연대 시절처럼 부총리가 모든 걸 쥐고 흔들 수 있는 경제 여건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동의한다. 재벌 기업 등의 힘이 비대해져서만은 아니다. 지난 2년 남짓 동안 기사로 다룬 정부의 대책만 수십건이다. 그런데 장기 침체 늪에 빠진 경기나 더 나빠지는 일자리 사정은 뭐란 말인가. 공수표 기사만 쓴 것 같다는 자책을 여러 번 한다.
미국에선 ‘페드 와처’(Fed Watcher·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를 집중 취재하는 기자)는 있어도 ‘재무부 와처’는 없다. 연준 위원들 발언 하나하나, 발표문 행간까지 해석한 기사는 쏟아지나 재무부 관련 기사는 드물다. 기자는 뉴스 가치와 취재원·기관의 영향력을 뒤쫓는다.
부총리·기재부 무용론을 꺼내려는 게 아니다. 외려 아쉬움이 커서다. 28일 발표된 ‘2016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은 추가경정(추경) 예산 편성과 물건값 깎아주기 정책이 사실상 전부였다. 한 매체의 기자는 “기사를 쓴 건지 현대차·하이마트 광고 전단지를 쓴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랜저 사면 308만원 혜택’ ‘에어컨 사면 20만원 돌려줘’. 29일자 신문 기사에 이런 제목이 달렸다.
경제정책방향이 줄곧 자잘한 대책만 담은 건 아니다. 눈이 번쩍 뜨일 때도 있었다. 2014년 7월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이 부총리에 취임한 직후 내놓은 ‘경제정책방향’이었다. 장기 침체의 원인을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의 불균형에서 찾고, 가계소득 증대를 위한 정책 패키지가 핵심이었다. 정책 목표를 규제 완화·생산성 제고 등 공급 부문이 아니라 소득 증대라는 수요 부문에 맞춘 것이다. 확장적 재정정책도 눈길을 끌었다. 정책과 진단의 전환, 보수 정부의 진보적 해법으로까지 읽혔다. 당시 발표문의 제목은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이 아닌 ‘새경제팀 경제정책방향’이었다. 기조 변화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정책은 1년이 채 유지되지 않았다. 한 시민단체는 ‘태산명동서일필’이라고 평했다. 전임이 시늉만 한 정책을 후임이 더 발전시킨다고 탓할 이들은 없을 터다. 유 부총리는 재임 기간 동안 한 두차례 더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할 ‘기회’가 있다. 순둥이 부총리, 힘내시라.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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