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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신용할당’에서 ‘정치금융’까지 관치의 역사

등록 2016-07-06 17:07수정 2016-07-06 23:24

[더(The) 친절한 기자]
시대마다 성격을 달리해
좋은 관치란 없는가?
공공성·비강제성·투명성 갖춰야
‘관치금융’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최근 서별관회의에 제출된 문건이 공개되고 나서다. 이 문건에는 지난해 10월22일 당시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과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임종룡 금융위원장 등이 함께 논의한 자리에서 부도 위기에 몰린 대우조선해양을 살리기 위해 국책금융기관은 물론 민간 은행들까지 각 기관이 떠 앉는 분담금 규모가 담겨 있다. 이 자리에는 분담금을 내는 민간 은행의 수장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돈을 내는 주체는 논의에서 빠진 채 청와대와 정부 관리들이 모두 결정한 셈이다.

정부는 물론 전문가들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관치는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을 말한다. 대형 사모펀드가 존재하는 등 금융시장이 성숙된 미국과 여건이 다른 우리나라에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선 시장의 자율적인 의사 결정에 구조조정을 맡겨 둘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구조조정 범위가 커, 국민 경제에 미칠 영향이 클 때는 민간금융기관의 이해만 좇다보면 그 부담은 국민이 져야 한다. 자율로 포장된 민간 은행의 사익 추구에 수만명의 운명이 재물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달부터 본격화한 해운·조선업종 구조조정 과정에 컨트롤타워·정부 리더십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렇듯 관치는 양면성을 함께 가진다. 이에 견줘 우리 사회에서 관치는 부정적인 맥락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관치를 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때도, 정부 관료들은 “관치는 없었다”고 무조건 부정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홍길동과 관치 기술자인 정부 관료들의 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금융감독원의 고위 간부를 지낸 한 인사는 “관치를 인정하는 순간, 그 누구도 관치를 하게 된 배경과 필요성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냥 당국은 죄인이 되기에 관치 비판이 나오면 논리에 맞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부정부터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그 시절의 관치 우리나라가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고속 성장을 한 원인 중 하나는 국가주도 경제개발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성장 공식을 그대로 따온 전략이다. 정부가 직접 산업 전략을 짰고, 금융이 이를 뒷받침했다. 이 시절의 관치금융은 ‘신용할당’을 뜻했다. 시장이 미성숙한 상태였던 터라 정부가 산업 전략에 따라 직접 자원(돈)을 배분했다. 은행은 정부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정상 국가라면 정부는 세금으로 마련된 예산으로 자원을 배분하지만, 개발 연대 시대엔 예산의 부족을 금융이 대체했다. 과거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및 금융위원회) 출신의 한 관료는 “당시에는 주사(6급 공무원)가 은행장에 전화해서 특정 기업에 대출을 지시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이런 신용할당은 국가 주도 경제발전 전략의 중요한 한 축을 맡았고, 보릿고개 탈출 등 고속 성장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신용할당은 정실 인사와 부정부패, 특혜를 낳은 자양분이었다. 최종건(SK 창업주)·이병철(삼성 창업주) 등의 자서전이나 평전에 빠지지 않는 유사한 일화들이 담겨 있다. 자금 부족에 시달릴 때 청와대나 정부 고위 관리를 만나 결국 저리의 대출을 받아냈다는 내용이다. 불도저 같은 사업가적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삽입된 일화이지만 달리 보면 특혜 금융을 받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여하튼 신용할당식 관치금융의 부작용은 1997년 외환위기로 세상에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당시 외환위기는 국가 주도 경제성장 전략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정실 인사와 특혜금융 탓에 은행은 과도한 부실채권을 떠안고 있었고, 기업들도 문어발식 확장을 하다 된서리를 맡았다. 당시 5대 시중은행(조흥·상업·제일·한빛·서울은행)은 모조리 무너졌고, 정부 고위관료나 기업인 간의 뇌물 스캔들 뉴스는 꼬리를 물었다. 외환위기는 신용할당의 사망선고였다.

■ 정치금융의 등장 위기 이후 신용할당이 줄고 관치 기술자의 영향력이 빛 바래면서 나타난 현상은 무엇일까? 관치금융의 축소는 민간금융기관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는 걸 뜻한다. 모피아(옛 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 즉 관치 기술자에 항명하는 경영자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14년 고인이 된 김정태 초대 국민은행장이다. 증권맨 출신인 김 행장은 ‘시장의 수호자’라는 별칭을 같고 있을 정도로 관치 배격론자였다. 사사건건 금융당국과 갈등을 빚던 그는, 재임 당시 부실기업이던 하이닉스 구조조정에 자금 지원을 주주의 이익에 반해 할 수 없다며 당국과 정면 대립했다. 국민은행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는 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그의 반발은 2000년대 달라진 금융계 분위기를 반영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민간 은행들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린 건 이명박 정부 들어서다. ‘기업 프렌들리’를 앞세워 집권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관치 기술자들 사이에선 “우리는 모두 죽었다”라는 말이 나왔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는 관치 기술자의 사령탑인 금융위원장(전광우)와 부위원장(이창용)을 모두 관료가 아닌 민간인으로 배치했다. 관치 기술자의 손발 구실을 하던 산업은행장도 미국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국내지점장을 하던 민간인 민유성씨를 앉혔다. 관치 기술자들의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흥미로운 건 이명박 정부 때는 관치금융의 자리를 ‘정치금융’이 메웠다는 사실이다. 갑(청와대·정치권)-을(관치 기술자)-병(민간 은행) 구조에서 수십년을 살던 민간 은행들이 을을 뛰어넘어 갑과 손을 직접 맞잡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 공교롭게도 하나금융회장(김승유)·케이비(KB)금융회장(어윤대)은 모두 이 대통령과 직접 교분이 있는 인물이다. 신한지주의 라응찬 회장은 당시 상왕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과 가까웠다. 이른바 정치금융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치금융에 자리를 내어줬다고 해서 관치금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치금융이 약해질 때 관치 기술자들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이명박 정부 말기에 어윤대·김승유·라응찬은 모두 불명예 퇴진했다. 정치 권력을 자양분 삼아 등장한 정치금융의 예정된 몰락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2008년 금융위원회 고위 관리를 지낸 한 인사는 “관치가 사라지자 정치금융이 권력을 잡았다. 영세 자영업자의 부담을 덜기 위해 신용카드사의 수수료 인하와 같은 정책들도 관치라는 공격을 받으며 쉽게 추진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정치금융은 관치금융만큼이나 많은 폐혜를 남겼다. 관치 기술자의 지시를 받지 않았을 뿐 정치 권력에 구애했기 때문이다. ‘자원 배분의 왜곡’이라는 관치금융의 폐혜가 정치금융에서도 반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대표적인 예가 국민은행의 카자흐스탄 광산 회사(BCC) 지분 투자였다. 해외 자원 개발을 강조하던 정권의 기조에 맞춰 광산 투자에 나섰다가 국민은행은 1조원대 손실을 안았고, 이 투자를 결정한 강정원 당시 케이비금융지주 회장은 결국 옷을 벗었다. 금융계 한 인사는 “강 회장은 당시 정권과 개인적 네트워크가 취약했다. 사외이사에 권력에 가까운 사람을 앉히는 등 방어막을 치긴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이런 배경 속에서 무리한 자원 투자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 관치의 필요조건은? 규모가 큰 구조조정에선 채권자들 간의 뜻이 잘 맞아야 한다. 가령 4개의 은행이 한 부실해진 기업에 각각 100억원씩 빌려줬다고 하자. 이 때 한 은행이 돈이 떼일 것이 두려워 지원을 기피하게 되면 나머지 은행 세곳이 그 부담을 떠안아야 하지만 그런 의사결정을 스스로 할 착한 혹은 바보같은 은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을 빌려준 은행은 경쟁 은행의 의사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언제든 돈을 뺄 궁리만 하게 마련이다.

관치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문제의 기업을 살리는 게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땐 정부가 나서 은행들의 이탈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은 주주의 이익을 따르지만 정부는 원래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곳이다. 이런 관치는 개발연대식 신용할당과도 다르다.

관치에 가까운 영어식 표현은 ‘도덕적 설득’(Moral persuasion)이다. ‘좋은 관치’의 기본 조건이 공공선과 설득이란 뜻이다. 서별관회의 문건에서 관치의 행태가 고스란히 드러났음에도 서별관회의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적은 이유도 구조조정이 은행(채권자)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선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있어서다.

투명성도 필요하다. 공공선의 수혜자인 국민들이 관치가 어떤 형태로 이뤄졌는지에 대해 관치 기술자들이 소상하게 설명하거나 공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2008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화다. 그 해 봄 미국의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IB) 수장을 한 데 불러모았다. 미국 경제가 살기 위해선 각자 위험을 분담해야 하고, 이를 위해 정부가 마련한 계획에 모두 서명하라고 압박했고 서명을 받아냈다. 은밀하게 진행된 이런 관치 행위는 수년이 지나 후임인 가이트너 장관과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의 자서전에 고스란히 담겼다. 2008년엔 은밀한 관치였으나, 사후적으로는 국민들이 알아야 할 하나의 기록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관치 기술자들은 이런 노력에 게으르거나 부정적이다. “그 때 그 일을 그냥 묻어두는 게 속 편하다”는 쪽이 다수다. 한 때 공개적인 자리에서 “관( 官)은 치( 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해 관치의 대명사가 된 한 전직 장관에게 자서전을 쓸 생각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관료) 후배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관치 기술자들은 관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되고 있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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