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낙하산으로 왔기 때문에 전 부채가 없다. 오히려 제가 어떤 의미에서 적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홍기택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가 산업은행 회장으로 있던 2013년 10월29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낙하산 인사라는 지적을 받자 한 얘기다. 임명권자의 후광을 믿어서인지 답변이 뜻밖에 당당하면서도 솔직했다. 하지만 홍 전 회장은 산은 수장으로서 “할 수 있는 여지”를 살리기는커녕 현 정부 인사 실패의 대표 사례가 되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한편에서 나온 실무경험 부족 등의 우려를 무시하고 그를 임명한 결과다.
지금 홍 전 회장은 산은의 부실 경영이 드러나고, 우리나라가 4조3000억원의 분담금을 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부총재 자리에서 떨려날 처지가 되면서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의 ‘원죄’에 국제적 망신까지 겹쳤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홍 전 회장에게 공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의 폭로가 낙하산 인사와 청와대 서별관회의의 문제점을 새롭게 또는 더깊게 인식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책임을 덜기 위해 한 인터뷰가 결과적으로 관치금융의 일그러진 모습을 꽤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이번 일을 잘만 처리하면 관치금융의 폐해를 줄일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홍 전 회장 선임은 낙하산 인사가 잘못 되면 어떤 위험이 있는지 새삼 일러준다. 자리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내려보내면 해당 기관은 물론, 나라경제에 많은 손실을 끼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미안한 얘기지만 홍 전 회장은 산은의 민영화를 주장하던 사람이라 정책금융에서 큰 구실을 하는 산은 회장이 되기에는 애초부터 흠결이 컸다. 임명된 뒤 자신의 생각을 바꿨겠지만 여전히 찜찜해보이는 게 사실이다. 특히 그는 대우조선 사례에서 보듯,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는 부실기업 처리에서 제구실을 못해 국민 부담을 늘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 그를 정부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부총재로 보내는 배려를 했다. 취임한 지 몇달만에 중국 쪽의 사임 압박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1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대우조선 지원 방안을 논의한 청와대 서별관회의 등과 관련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서별관회의 또한 문제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등 정부의 경제 운용 수뇌부가 모여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하면서도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미 보도된 대로 대우조선에 대한 4조2000억원의 금융지원은 사실상 서별관회의에서 결정됐다. 대우조선이 분식회계를 했다는 의혹이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짚지 않은 채…. 회의 과정에서 오고간 얘기를 담은 회의록이 없다보니 왜 이렇게 됐는지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낙하산 인사가 무조건 잘못됐다거나 청와대 서별관회의를 없애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역기능은 줄이고 순기능은 살려야 한다. 말이 좀 그렇긴 하나 낙하산 인사는 필요하다고 본다. 대통령이 정부 산하 기관장에 자신이 적합하다고 여기는 인물을 임명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 아니다.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산하 기관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내고 싶은 게 대통령 마음일 테니까. 중요한 것은 자리에 적합한 인물을 임명하느냐 아니냐다. 그런데 문제는 공모 절차 등을 거치긴 하지만 대체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고 부적합한 사람이 조직의 책임자로 내려꽃히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적격자를 선임하기 위한 방안을 좀더 고민해야 할 때다.
청와대 서별관회의도 마찬가지다.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 말마따나 요즘처럼 대내외 경제 여건이 복잡하고 통제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주무 장관이 혼자 결정하기보다 관계 장관들이 함께 모여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정부는 이런 과정을 거쳐 적절한 결정을 하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비공개로 논의를 하더라도 회의록 등을 남겨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한다. 지금 같은 방식을 고수하면 쓸데 없는 오해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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