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당선이 기정사실화된 9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피지수 급락과 환율 급등 상황이 표시돼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나는 수천대의 텔레비전을 살 수 있는 돈이 있다. 나는 제너럴일렉트릭(GE)과 같은 미국산 텔레비전을 사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삼성, 엘지, 소니 제품뿐이다. 우리는 더이상 텔레비전을 만들지 않게 됐다.” (2016년 7월30일 미국 <에이비시>(ABC)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미국 최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선거 핵심 구호로 삼았다. 그 수단으로 무역 상대국에 대한 관세 부과, 반덤핑 제소, 환율조작국 지정 등을 제시해 왔다. 그는 20년간 운용 중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포함해 대부분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재검토하겠다고 언급했으며,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반대 뜻을 뚜렷하게 밝혔다. 트럼프 당선자의 통상정책 기조가 ‘강한 보호무역주의’로 평가되는 이유다. 트럼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는 ‘재협상’을 직접 말하지는 않았으나 “일자리를 없앤다”거나 “재앙”이라고 비난해왔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는 “(트럼프가) 자유무역협정 폐기를 협상 카드로 삼아 일부 조항에서 미국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재협상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최근 2년간 한국은 수출이 크게 부진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시각에선 한국은 ‘미국에 물건을 팔아 미국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나라들’에 속한다. 실제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2008년(80억달러) 이후 해마다 불어나, 지난해엔 258억달러에 이르렀다. 한국은 미국의 교역 상대국 중 다섯번째로 대미 무역흑자액이 많은 나라다. 자유무역에 반감이 강한 트럼프 행정부의 예봉을 피하기 어려운 처지인 셈이다.
트럼프 당선자가 이런 보호무역주의를 취임 뒤 얼마나 구체적인 정책으로 펼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일부에선 백악관에 들어간 뒤에는 다소 유화적인 태도로 바뀔 수 있다는 전망도 한다. 트럼프도 여러 차례 중국산 제품에 대해 4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하면서도 “45% 관세는 일종의 협박으로 이보다 낮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간 발언이 일종의 ‘협상용’일 수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미 관세법이나 무역법 등은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강력한 무역 제재 권한을 곳곳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트라가 파악한 미 행정부의 무역구제 수단만 ‘반덤핑과 상계 관세’(관세법), ‘201조 세이프가드’(무역법) 등 8개에 이른다. 미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트럼프의 ‘결심’만으로 주요 무역 상대국에 세금 폭탄을 던지거나 수입 규모를 제한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둔 제도들이다. 미 재무부 차관을 지낸 프레드 버그스턴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트럼프 당선자가 취임 뒤 즉각 취할 수 있는 무역구제 제도로 ‘무역법 122조’를 들었다. 이 조항은 대통령이 국제수지나 달러 가치 관리가 필요하다고 볼 때 무역협정을 맺은 상대국의 제품에 대해 최장 150일간 최대 15%의 관세를 인상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런 통상법을 발동시키지 않고도 외환시장 경로를 통해 한국의 수출을 수렁으로 몰고 갈 수 있다. 한국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 중 하나다. ‘환율조작국’ 지정 위협을 통해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원-달러 환율이 떨어져 원화 강세가 되면 국내 수출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은 크게 훼손된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미·중·일 사이에 무역과 환율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다.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대상국이 앞다퉈 자국 통화가치 절하에 나서고 무역 장벽을 둘러친다는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시나리오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런 상황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 대선 이후 세계 경제 질서의 근본적 재편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 속에서도 한국 정부는 기존에 하던 관성적인 대응 이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날 오후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경제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비상한 각오를 갖고 일사불란하게 대처해 달라. 적시성 있는 대책이 최대한 신속히 발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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