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맞는지 그른지, 출처는 어딘지를 포함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 9일(현지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된 통화정책회의를 끝낸 뒤 연 기자회견에서 진땀을 뺐다. 17~18일 열리는 ‘주요 20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회의’(이하 G20 경제회의)에서 발표할 공동선언문에 과거와 달리 ‘보호무역주의에 저항한다’ 등의 문구가 빠지냐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진 탓이다. 드라기 총재는 “자유무역과 변동환율제는 경제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으며, 주요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이제까지 형성한 공감대는 이번에도 재확인돼야 한다”고 말한 뒤에야 기자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릴 G20 경제회의 개막을 앞두고 전운이 감돌고 있다. 보호무역주의를 내건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뒤 처음 열리는 회의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거센 입김에 그간 국제 사회가 형성한 공동전선이 허물어지면서 각자도생의 시대가 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앞서 지난 6일(현지시각) <블룸버그>는 G20 경제회의 공동선언문 초안을 입수해 보도했다. 3월1일자로 돼 있는 이 초안은 과거 선언문과 큰 차이가 있었다. 예전엔 통상 들어가던 문구들이 빠지거나 다른 표현으로 대체됐다. “모든 형태의 보호무역주의에 저항한다”, “경쟁적 통화 절하 조처를 하지 않는다”,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 등의 표현이 사라졌다. 대신에 “개방적(Open)이고 공정한(Fair) 무역 질서를 유지할 것이며, 환율에 대한 과거 합의는 재확인한다”란 문구가 들어갔다.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반대가 두루뭉술해진 셈이다. 특히 새로 들어간 ‘공정무역’은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이 입에 자주 올리는 표현으로 그간의 자유무역이 사실은 불공정하다는 전제가 깔렸다. 기자들이 드라기 총재에게 따져 물은 것은 이례적인 변화가 드러나는 초안이 진짜가 맞느냐는 것이었다.
G20 각국 대표단 중 어느 쪽도 <블룸버그> 보도가 사실인지를 확인해주지는 않았다. 우리 기획재정부 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공동선언문은 회의 당일 아침까지도 계속 바뀌며, 문구를 놓고 각 국가 대표단끼리 치열한 논쟁과 협의를 거치는 게 지금까지의 관례였다”고 말했다. 초안 자체에 큰 무게를 둘 일은 아니라는 설명이나, 초안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하지도 않은 셈이다. 마침 미 재무부는 13일(현지시각) G20 경제회의 관련 브리핑을 열어 “미국은 개방되고 공정한 무역에 전념할 것이며, 이는 미국 기업과 노동자에게 전 세계적으로 공정한 경쟁의 장이 마련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은 그간 G20 내 협력과 갈등 구조의 변화도 예고한다. 2010년께 유럽 재정위기를 계기로 G20은 재정확장과 통화완화를 강조하는 미국과 일본,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쪽과 돈 풀기의 부작용을 경계하며 구조개혁에 무게를 두는 독일이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선 보호무역주의, 외환시장 개입, 이주민 거부 등을 앞세우는 미국 정부와 이에 반대하는 나머지 국가들의 대립각이 뚜렷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독일 정부 역할론이 주목된다. 외교 안보 등의 문제로 엮인 영국과 일본이 미국에 뼈 있는 소리를 하기 힘든 상황에서 독일이 자유무역 옹호 진영의 대표 주자가 될 것이란 얘기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1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예정(17일) 소식을 전하며, “강력한 파괴자(트럼프 대통령)가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세계 질서의 마지막 수호자(메르켈 총리)와 대면한다”고 평했다.
한편 한국에선 유일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이번 회의에 참석한다. 기재부는 미·중 두 나라 재무장관과의 회담을 추진 중이나 사드 배치 관련 경제보복 논란의 당사자인 중국 쪽에선 회담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김경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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