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격렬한 반대 속에 증권집단소송제가 도입된 이후 본안소송 승소로 소액 투자자들이 피해를 구제받는 첫 사례가 나왔다. 2005년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이 시행된 지 12년 만이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집단소송제 확대를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이미 도입됐지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증권집단소송의 실효성을 높이는 한편, 미국 등 다른 선진국처럼 일반 공산품으로까지 소송 범위를 대폭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7일 독일계 은행인 도이치은행 소송 대리인은 서울고법 민사 10부(윤성근 부장판사)를 찾았다. 올해 1월 원고 승소 판결에 불복해 진행해온 항소 절차를 중단한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증권집단소송을 제기한 투자자들이 승소 확정 판결에 따라 구제를 받는 첫번째 사례가 나온 순간이었다. 집단소송제는 소송에 참여를 하지 않더라도 피해자 대표가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하면 함께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소송에 참여한 사람만 피해를 구제받는 ‘단체소송’과는 다르다. 지난 2000년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의 입법 청원 운동이 시작된 이후 5년여 만인 2005년에 도입됐다.
이번 소송의 발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8월 도이치은행이 발행하고 한국투자증권이 판매한 ‘한투289ELS’란 이름의 주가연계증권은 모두 198억여원어치가 팔려 나갔다. 이 상품은 계약기간 동안 이 주가연계증권의 기초자산이 되는 상장주식의 가격 변동에 따라 높은 수익금을 투자자에 주거나 손실을 안기는 파생금융상품이다.
계약 만기일인 2009년 8월 장 종료 직전에 도이치은행이 기초자산인 국민은행 주식을 낮은 가격으로 대량 매도하며 주가를 끌어내리는 시세조종에 나서면서 이 상품을 산 투자자는 손실을 봤고, 투자자들은 증권집단소송으로 피해구제에 나섰다. 법원은 1심에서 도이치은행의 시세조종 행위를 인정하며 손을 들어준 데 이어, 이번에는 도이치은행이 항소를 취하하면서 소송이 일단락됐다.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투자자를 포함해 모두 464명이 120억원의 돈을 나눠 받게 된다.
증권시장에 시세조종 등 주식 불공정거래나 회계분식으로 소액투자자가 손실을 떠안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증권집단소송제를 통해 소액투자자가 피해를 구제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제도 도입 후 첫번째 집단소송인 진성티이씨를 상대로 2009년에 시작된 소송은 ‘화해 조정’ 방식으로 배상이 이뤄졌고, 2010년 캐나다왕립은행을 상대로 한 집단소송도 화해가 이뤄져 배상 수준을 놓고 논의가 진행 중이다. 2건 외에 나머지 6건의 소송은 본안소송의 문턱도 넘지 못하는 등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증권집단소송제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는 평가를 받게 된 데는 소송 대상이 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데만 통상 3년이 걸리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피해자 스스로 소를 포기하는 일이 반복된 영향이 크다. 피해 입증을 위해 관련 자료를 소액 투자자들이 확보하기 어렵고 패소 때 소액 투자자들이 소송 비용을 모두 물어줘야 하는 것도 이 제도가 안착되지 않은 배경으로 꼽힌다.
물론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은 꾸준히 이루어져왔다. 대표적으로 19대 국회 때는 집단소송의 대상을 비상장법인으로 넓히는 법률 개정안이, 20대 국회에선 본안 소송이 좀더 수월하게 되도록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최종적으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2년 대선 당시 집단소송제는 증권 분야를 넘어 일반 분야에까지 확대하는 공약을 내놓았으나 이행되지는 않았다.
미국은 집단소송제가 소비자 보호 구제 장치로 폭넓게 활용되는 나라로 꼽힌다. 증권 분야 피해 외에도 불량 공산품에 따른 피해도 집단소송의 범주로 두고 있다. 한 예로, 독일 폴크스바겐이나 일본 도요타 자동차가 차량 결함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미국 소비자에게 물어내는 데 이 제도가 활용됐다. 소송 비용도 악의적 소송만 아닌 경우에는 소송을 제기한 투자자나 소비자들이 물어주지 않아도 된다.
집단소송제의 실효성을 높이고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소비자 피해를 효율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공정위는 소액·다수의 소비자 피해를 보다 효율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집단소송제 도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경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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