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과학박물관의 로봇 전시회에서 한 기술자가 인공 로봇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아내에게 수시로 들어온 ‘구박’이 있다. 둘째 아이는 낳아서 첫 돌이 될 때까지 자기 혼자 키우다시피 했는데, 아이가 나중에 아빠를 알아보고 ‘심지어’ 좋아하기도 해 억울했다는 것이다. 둘째를 낳은 직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 불리는 경제위기가 닥쳐 일이 바빠졌고, 몇 달간 자정 이전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시기가 지났어도 일찍 퇴근해 집안일을 돕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주변 친구들도 많이들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이제 시간이 흘렀으니 직장인들의 사정이 나아졌을까? 지난주 발표된 통계를 보니 한국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멕시코에 이어 가장 오래 일을 하는 나라였다. 단순비교로 독일보다 1년에 4달을 더 일했다. 통계의 기준이 동일한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1달 반에서 2달 더 일했다. 전일제(풀타임) 근무가 80%가 넘는 경직성도 한국 노동현장의 특성이었다.
자원 없는 나라가 살아가려면 일이라도 길게 하는 수밖에 없을까? 다른 삶도 있는 것 같다. 스웨덴의 많은 아빠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6시간만 일한다. 아이를 집에 데려와 함께 놀아주는 것이 다음 일과다. 네덜란드의 시간제 노동자는 고용보장, 임금, 복지에서 전일제 노동자와 차별이 없다. 500인 이상을 고용하는 독일 기업 중 89%가 근로시간저축 계좌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이 많아 야근하면 초과 근무시간을 계좌에 쌓아둔 뒤 아이를 돌보거나 공부를 더 하고 싶을 때 꺼내 쓴다. 비록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지만, 이런 유연한 노동은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낮을 때부터 시행해 왔다고 한다.
한국인은 고단하다. 일이 보람이기보다는 부담이다. 아이를 낳을 수도, 기를 수도 없어 젊은이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나라. 우리의 노동 현실에 큰 책임이 있다. 깨어 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보내는 직장에서 일이 즐겁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 없다. 좋은 일자리 만들기를 주요 국정과제로 삼은 문재인 대통령은 20일 열린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연장근로를 포함해 노동시간을 주 52시간제로 빨리 확립하고 연차휴가를 다 사용하도록 해서 일하는 부모들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유를 갖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국회도 다음 주 환경노동위원회를 열어 법정 근로시간의 예외를 인정해 준 특례업종 축소를 포함해 주 52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심의할 예정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지난 대선에서 여러 후보가 공약했고, 여·야가 공감하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법정 노동시간만 잘 지켜도 개인과 가정, 직장의 모습이 크게 바뀐다.
그런데 우리는 노동시간 단축에 그치지 말고 일과 관련해 좀 더 ‘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일자리, 고용구조, 근무형태 등 일의 성격과 모습에 큰 변화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호 변화, 세계화, 인구구조 변화 같은 요인에 더해 4차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기술변화가 일에 ‘혁명적 변화’를 가속하고 있다. ‘양질의 일자리’라는 정책 지표만 해도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의 틀로 접근해서는 잡히지 않는 영역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일의 변화를 살펴보고 어떤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논의할 때가 됐다. 우리가 바라는 ‘좋은 일 ‘을 바탕으로 고용, 노동, 분배, 교육 제도를 재구축해야 한다.
일자리, 일하는 방식, 분배(복지), 혁신(생산성)이란 4개의 열쇳말로 ‘일의 미래’를 짚어보고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는 등 시간선택제로 일하고 픈 직장인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자료: ‘일가 양득’ 누리집
일자리: 미래가 두려움만은 아니다
일자리와 관련해 우리는 은연중 “완벽했던 옛날’” 을꿈꾼다. 일하고 싶은 모든 이가 직장을 가진 완전고용, 그것도 전일제?정규직으로 고용된 상태 말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지난 수십년간 경제를 그 반대 방향으로 끌어 왔다. 생산력이 이미 더 적은 노동력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 이상을 만들어내는 수준이 됐기 때문이다. 세계 모든 정부가 노력하지만 양질의 일자리가 쉽게 늘지 않는 것도 근원을 따지면 여기에 닿는다. 우리 역시 제조업의 자동화가 빠르게 진전된 나라 중 하나이다. 송호근 교수(서울대)가 쓴 <가보지 않은 길> (나남)을 보면 자동화가 현대자동차 노동현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보여주는 노동자 인터뷰가 나온다.
“58초5에 한대가 생산돼야 합니다. (…) 58초 중 우리가 임팩트를 갖고 작업하는 시간은 볼트 한 6개 박는 거 해봐야 7초면 끝납니다. 나머지는 장비가 움직이는 게 대부분이죠. (…)”
여기에 4차 산업혁명 담론이 부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일자리의 미래를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 같은 정보지능 기술은 노동을 표준화, 자동화한다. 고도의 숙련이 필요치 않은 일, 정형화된 일을 하는 직업은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대체 되는데, 이번에는 생산직뿐 아니라 사무직이나 전문직까지 영향이 퍼지리란 전망이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미래고용보고서>는 4차 산업혁명 영향으로 주요 나라에서 5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이후 어떤 일자리가 사라질 가능성이 큰지를 보여주는 보고서 등을 포함해 많은 예측이 쏟아졌다.
하지만, 직업의 소멸은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란 반론도 많다. 경제사를 살펴보면 기술진보는 생산성을 높여 새로운 수요를 낳고, 더 많은 고용으로 이어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1960년부터 50년간 제조업 일자리의 3분의 2가 줄었다. 그 대신 서비스업 일자리가 대폭 증가했다. 급여는 85%나 증가했으나 노동시간은 오히려 감소했다. 이렇게 새로운 기술이 우리 직업현장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면 일부 직업은 사라지지만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 것이다. 특히 인간의 공감이나 관계 형성 능력에 기댄 돌봄 같은 서비스 업종의 중요도는 더 커질 것이다. 남은 직업은 일부 직무만 자동화돼 인간과 기계가 협업하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의사가 데이터와 진단은 인공지능에 의존하되 복잡한 수술은 직접 맡는 식이다.
다만 기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유망 일자리와 그렇지 않은 일자리 사이의 차이가 벌어져 자리다툼이 심해질 수 있다. 직업이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노동의 질적 측면에 대한 고민은 남는다. 기계에 의해 대체되지 않고 남는 일자리의 상당수가 부차적인 노동이나 저임금 노동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비해 일자리가 부족하다면 일자리를 나누거나, ‘일=소득’이란 공식을 벗어난 분배 시스템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일하는 방식: 큰 변화가 온다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해도 일하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노동조건과 노사관계에서 갈수록 ‘정상’이라는 기준이 모호해진다. 디지털 기술은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및 소비를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한다. 플랫폼 경제(O2O 경제)의 대표주자인 에어비앤비는 객실을 하나 갖지 않고도 세계에서 가장 큰 숙박업체가 됐으며, 우버도 자동차 한 대 없이 가장 큰 렌터카 업체가 됐다. 이런 변화는 유연하고 다양한 방식의 새로운 노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선 고용의 형태가 달라진다. 지금까지 정규직, 비정규직이 일자리의 가장 큰 구분법이었다면 이제는 노동자인지 자영업자인지 여부가 모호한 고용이 확산하고 있다. 배달 앱이나 대리운전 앱은 새롭게 일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일을 작은 프로젝트로 쪼개 전 세계를 상대로 노동을 모집하는 ‘크라우드 소싱’도 늘고 있다. 노동의 형태도 달라진다. 디지털 기술이 가능케 해 준 이동성은 노동의 시공간 경계를 허문다. 스마트폰 등으로 연결만 되면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하나의 작업장에 고정된 노동이란 노동개념은 의미를 잃게 됐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전일제냐 파트타임이냐의 구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아울러 ‘언제나 연락 가능한 상태’가 되면서 직업과 사생활 영역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덕분에 개인이 자율적으로 근무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도 있게 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일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2016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공약한 ‘칼퇴근’ 법 제정이나 최근 발의된 근무시간 이후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업무지시를 금지하는 법안 등은 이런 변화에 대응한 것이다. 아울러 직장 문화도 몰입형 근무(딥 워크)를 강조하고, 출근 중심이 아니라 산출물로 보여주는 문화가 확산될 것이다.
(2회로 이어짐)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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