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 등이 공동주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조동철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 한국의 저성장 현상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한국은행 제공사진.
“과감한 구조개혁만이 한국이 성장하기 위한 유일한 원천이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조동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은 지난 7일 한은과 기획재정부, 국제통화기금(IMF),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가 공동주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한국 경제는 일본과 20년 시차를 두고 매우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양적완화나 마이너스금리 정책과 같은)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포함한 비상 조처가 필요한 때가 올 수도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초부터 20년 남짓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을 뒤따르는 한국 경제의 유일한 탈출구가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기득권을 타파하는 데 달려 있다는 취지다.
경제가 성숙 단계로 진입하면 성장률은 점차 떨어진다. 한국의 성장률 둔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돼 왔다. 산업이 고도화되고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1970~1990년대 경험한 고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성장률은 2020년대 후반 무렵에 2%대 초반으로 내려앉은 뒤, 2034년에 1%대로 하락한다. 이후 15년 뒤부터는 1%대 성장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심지어 한국의 성장률은 멀지 않은 미래에 오이시디 회원국 평균치에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하락할 전망이다. 이 기구 전망대로라면 앞으로 14년 뒤인 2031년께 한국의 성장률(2.14%)은 회원국 평균(2.17%) 아래로 내려앉고 이후로도 성장률 격차는 더 확대된다. 경제여건이 더 성숙한 다른 선진국들보다도 한국이 더 낮은 성장을 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번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모리스 옵스펠트 아이엠에프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아시아 국가는 부자가 되기도 전에 늙고 있다”는 주장을 폈는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닌 셈이다.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 경제 전문가들은 대체로 저성장 탈피를 위해 여성의 경제활동참여를 높여 노동력 부족에 대비하고, 연구개발·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려 기술혁신에 나설 것을 권고한다. 통화와 재정을 확장적으로 편성하고 소득분배를 개선해야 한다는 처방도 뒤따른다.
조 위원은 12일 <한겨레>와 만나, 이런 처방에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아이엠에프가 권고한 ‘여성 고용 확대’를 언급하며, “고령화에 따른 노동 공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 고용 확대를 말하지만, 이렇게 되면 출산율이 외려 떨어져 (기대와 달리) 노동 공급이 줄어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직장내 성평등도를 높이고 보육지원정책이 충분히 뒤따르지 않을 경우 여성 고용 참여 확대가 역풍을 부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인풋(Input·노동 및 자본의 공급)을 늘리면 성장이 더 높아진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과정에서 또다른 변수들에 영향을 줘 효과가 나지 않을 수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는 또 정부가 펴는 소득주도 성장 정책에 대해서도 “단기적 처방은 되지만 중장기적으로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처방은 아니다”라고 비판적 거리를 뒀다.
조 위원은 효율성 개선을 강조한다. 그는 “같은 사람을 쓰고 같은 돈을 투자해도 1억원어치를 만드는 기업이 있고 5천만원어치만 생산하는 기업도 있다. 현재의 생산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 즉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높이는 구조개혁 정책을 펴야 하고,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보유한 인적·물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찾는 데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조 위원이 국내외 저명한 석학들 앞에서 ‘기득권 타파’를 외친 건 이런 맥락에서다. 경제 전반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핵심 원인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기득권’에 있다고 그는 본다. 조 위원은 기득권을 ‘능력보다 더 많은 보상을 누리는 현상’으로 풀이하며, “각종 자격증 제도와 같은 진입 규제 등으로 대기업 등 특정 세력이 독과점 이익이나 무분별한 정책자금으로 넘쳐나는 좀비기업(정부의 정책 자금으로 연명해가는 부실 기업)은 한국 경제가 구조개혁을 통해 더 성장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조 위원은 특히 노동시장의 경직성 해소를 강조했다. 그는 “현재 우리 사회를 보면 20대 때 인생 자체가 결정되는 것 같다. 한 예로 (20대 때) 명문대 간판을 따고 이를 토대로 공공기관 등에 입사하면 평생 안정적으로 고소득을 보장받지 않나. 20대 때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했더라도 그 이후에 능력을 갖춘다면 좀더 나은 직장과 더 많은 소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며 “무엇이 이를 가로막고 있는지를 살펴 (정부가 기득권의 저항을 뚫는) 개혁 정책을 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기득권 타파는 결국 정치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라며 “기득권을 깨는 작업은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부를 수 있어 인기가 없는 정책일 수 있지만 정부가 큰 그림 속에서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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