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돌아오고 있다.’
1937년 5월 미국 주간 <뉴요커>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물가가 3년 연속(1934~36년) 상승한데다 1937년 들어서도 오름세가 이어지면서 미국 경제가 드디어 대공황에서 탈출하고 있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실제 미국 물가는 1929년에 대공황이 시작된 뒤 성장률이 급락하며 4년(1930~33년) 연속 하락했다. 하지만 이런 보도는 결과적으로 빗나갔다. 미국 경제는 1938년부터 다시 침체에 빠지면서 또다시 2년 연속(1938~39년) 물가 하락을 경험했고, 결국 2차 세계대전(1939~45년)이 일어나고 나서야 대침체에서 벗어났다.
최근 1년 새 국내외 경제전문가들 가운데 1937년 뉴요커가 실었던 내용과 엇비슷한 ‘물가 인상 시나리오’를 언급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로 꼽히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불러온 물가 하락 위험이 점차 수그러들고 있으며, 세계 경제가 정상 궤도에 진입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묻어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인상하며 통화정책의 정상화 수순을 밟아가는 것도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장기 저성장’ 가능성을 경고하며 주요국에 확장적 재정 운용과 완화적 통화 정책의 필요성을 권고해왔던 국제통화기금(IMF)도 이제는 세계 경제에 봄날이 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기구는 지난해 10월 내놓은
‘세계 경제 전망’(WEO) 보고서에서 이전(지난해 7월)에 냈던 올해 경제전망치를 끌어올렸다. 그 결과 2016년에 3.2% 성장한 세계 경제는 지난해 3.6%, 올해에는 3.7% 성장할 것으로 이 기구는 내다봤다. 세계 경제의 확장세가 갈수록 더 커진다는 뜻이다.
최근 발표된 경제지표는 이런 훈풍이 좀더 거세게 불 수 있다고 예고한다. 지난 3일(현지시각) 발표된 미국의
‘12월 제조업지수’는 한 달 전보다 1.5%포인트 상승한 59.7%였다. 16개월 연속 확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한국 수출의 선행지표이기도 한 신규 주문 규모는 한 달 전보다 무려 69.4%나 늘어났다. 이 지표를 작성한 미국 공급관리연구소(ISM)의 팀 피오르 조사위원장은 “이번 결과를 볼 때 미소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생겨난
미국 민간 일자리도 시장 예상(19만5천개)을 크게 웃돈 25만개였다.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이런 경제 회복세가 가파른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까.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장기 저물가 시대가 저물 것이라는 주장이 적지 않음에도 이런 ‘물가 상승 시나리오’를 확신할 수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12월 미 연준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를 연 뒤 발표한 경제 전망에서 성장률 전망치는 종전 회의(9월)에 견줘 올리고 실업률 전망치는 끌어내렸으나 물가 상승률 전망값은 그대로 뒀다. 경제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보면서도 물가의 추가 상승 여부에는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앞서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지난해 9월 경기 회복세에 견줘 물가 상승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미스터리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고용이 늘고 생산이 활발해지면 그만큼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물가는 오르기 마련이라는 그간 경제학계의 ‘통설’에 현 경제 상황이 잘 들어맞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에 대한 고민을 한국은행도 지난해 11월 발간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 담았다. 보고서는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에서 성장과 물가 간의 관계가 약화되었다”며 “한국도 잠재성장률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성장세는 확대되었으나 물가 상승률은 (한은의 물가 목표인 2%에 밑도는) 1% 중반대에서 크게 높아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경제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2년 연속 3% 성장이 예상되지만 물가는 1.8% 상승에 그칠 것으로 한은은 전망하고 있다. 특히 한은이 애초 원화 약세(원-달러 환율 상승)가 올해 나타나면서 물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꼽은 점을 염두에 두면, 올해 들어 가팔라진 원화 강세 흐름으로 물가 상승률이 한은의 전망치(1.8%)에도 미치지 못할 여지도 커지고 있다. 환율이 떨어지면 수입 물가를 끌어내려, 전반적인 소비자 물가 상승폭도 둔화될 공산이 커진다.
경기 회복세에 물가 상승이 뒤따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세계화나 유통구조의 혁신 등 다양한 분석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꼽히는 것 중 하나가 더딘 임금 상승이다. 금융위기 이후 장기 저성장이 지속되면서 낮아진 노동생산성이나 임금 수준이 낮은 일자리를 메워가는 고령 인구의 증가, 노동 쪽의 약해진 협상력 등이 임금 상승을 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은도 앞선 보고서에서 “노동 생산성 둔화나 인구구조 변화 등에 따라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가 고용과 임금 간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주요 요인”이라고 꼽았다. 실제 <한겨레>가 고용노동부의 사업체노동력 조사 결과를 토대로 실질임금(5인 이상 상용노동자 임금 총액 기준) 추이를 따져보니, 2015년 2.58%에서 2016년 2.82%로 상승폭이 소폭 증가했으나, 지난해 3분기엔 외려 0.67%로 상승폭이 크게 줄었다.
일부에선 취약한 사회안전망이 임금 상승 압력을 줄이고 있다는 견해도 내놓는다. 윤인대 기획재정부 종합정책과장은 “한국은 실업을 할 경우 생활 자체가 어려워질 정도로 실업부조 제도가 취약하다. 이런 이유로 다니던 직장에서 자리를 잃게 되면 대부분 임금 수준이 낮고 고용이 불안한 일자리라도 찾게 된다”며 “(양적 지표인) 실업률이 높지 않다고 해서 고용 여건이 안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월 200만원을 주던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이 실업수당(고용급여)을 받으며 비슷한 수준의 일자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월 100만원이라도 주는 일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실업률은 높아지지 않지만 물가에 영향을 주는 노동 쪽의 구매력 자체는 줄게 된다.
결국 올해 물가의 오름폭을 가름하는 주요 잣대는 그간 낮았던 임금 상승률이 어디에 이를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 등 정부가 추진하는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 실제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미칠지 관심이다. 오는 4월 발표될 임금전망 보고서 작성에 참여하고 있는 정성미 한국노동연구원 전문위원은 “경기 회복에 따라 늘어날 일자리 규모와 최저임금의 큰 폭 인상에 따른 고용 감소 규모 등이 올해 임금 상승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며 “아직 새 정부의 정책 효과가 반영되는 올 1월분 고용·임금 지표가 나오지 않은 터라 현재로선 임금 전망을 예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의 귀환을 확신하기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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