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가치 있는 나눔 토론회'에서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가 ‘빈곤 대물림의 미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운이 좋거나 법을 어기거나’.
서울 동작구 사당동 재개발 철거민 가족의 25년을 기록한 책 <사당동 더하기 25>(2012년)를 펴냈던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사회학)는 ‘사당동 가족들’의 ‘그 이후’를 설명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이 둘 중 하나”라고 말했다. 올해는 1986년 조 교수가 재개발이 주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사당동에 들어가 정금순 할머니 가족과 인연을 맺은 지 꼭 33년째 되는 해다.
사당동 가족들의 삶은 나아졌을까?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느 누구도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세대를 타고 내려온 가난의 굴레는 사람보다 힘이 셌다. 포장마차를 여는 게 꿈인 손녀들은 여전히 단란주점에 일하러 나가고, 다른 자녀들도 임시직 일자리를 전전한다. 가난은 4대까지 이어졌다. 증손녀인 손녀 ㅇ씨의 딸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막내 손자는 살 곳을 제공해주는 사람과 주로 연애했다. 헤어지는 날은 그에게 곧 ‘방 빼는 날’이다.
그래서 이들은 “운이 좋으면 위험을 피해 가고, 나빠서 걸리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조 교수의 표현대로 ‘도처에 지뢰가 널린 상태’다. 운 좋게 지뢰를 밟지 않고 넘어가거나, 밟으면 법 밖으로 나가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면? 노동력, 주민등록증, 대포 통장은 물론 몸까지… 팔 수 있는 건 다 판다. 외부인의 눈에 비친 이들의 삶의 모습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증손녀가 학교폭력 피해를 입자, 엄마인 손녀 ㅇ씨는 합의금 150만원에 “학교에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증손녀는 졸업을 한달 앞두고 중학교를 자퇴했다. 이유를 묻자, ㅇ씨는 이렇게 답한다. “그걸로 애 티셔츠도 샀고, 머리끈도 샀고.” 딸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도 “왜 보험도 없이 차를 탔냐”는 말부터 먼저 나온다. 다른 자녀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거를 연애 상대에게 의지하던 막내 손자는 만나는 애인에게 맞춰 직업도 바꿨다. 헬스 트레이너, 스포츠 마사지사, 건설노동자, 바리스타 등 거쳐간 직업만 여러 개다.
조 교수는 “이들의 삶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렇다고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거듭 강조했다. 가난이 먼저 이들을 ‘보통의 삶’ 밖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사회·문화적으로도 단절되는 악순환이 강화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조 교수는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이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출연자가 “사흘만 일거리가 없어도 죽는다”고 말했는데, 녹취 푸는 작업을 맡은 대학생은 무심코 ‘3개월’이라고 썼다. 정작 빈곤층은 자신의 경험을 말로 잘 풀어내지 못하고, 대학생들은 ‘사흘 일을 못하면 죽는다’는 말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청년 빈곤은 결국 다음 세대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 악순환을 끊어낼 ‘구조적 완충지’가 필요하다.” 1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가치 있는 나눔 토론회’에서 기조강연을 한 조 교수의 마지막 당부다.
조 교수는 현재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33>을 준비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2009년), 책 <사당동 더하기 25>를 잇는 ‘사당동 시리즈’ 세번째 작품이다.
박선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원 s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