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8일 서울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총재는 “각 경제주체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장기적으로 그 이익도 지켜낼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염두에 둔 발언이냐는 질문에는 “원칙적인 얘기”라며 비켜나갔다. 한국은행 제공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8일 저녁 출입기자들과 송년 저녁자리를 함께했다. 한은이 진단하는 현재 경기상황, 글로벌 경제흐름 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4년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던 지난해 송년 저녁자리에서는 사실상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의외로 다시 만나게 돼 어색하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그런 그의 머리발언 중에 귀에 쏙 들어온 문구가 있었다. 미래 성장동력이나 선도산업 육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언급된 “각 경제주체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장기적으로는 그 이익도 지켜낼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대목이었다. 경제주체들이 당장의 밥그릇 다툼만 하다가는 국가경제라는 전체 파이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회적인 경고로 이해됐다. 마침 ‘이기(利己)를 앞세우면 이익(利益)을 못 지킨다는 강한 말씀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고민한 대목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이 나왔다.
“특정 부문을 얘기하자면, 또 막상 그 부문을 들어가보면 나름대로 애로가 있을 것” “어떤 특정 부문을 꼭 집어서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은 아니고, 그야말로 어떻게 보면 원칙적인 입장을 개진했다고 해야 할까” “(경제주체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 있는 게 아니다.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조차도 그렇다” 등의 답변이 나왔다. 당국자들을 배려한 듯한 “정책 당국자 입장이었다면 저도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을 충분히 이해한다” “카카오택시던가? 그 (중단) 결정을 보면서 정말 결정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는 발언도 이어졌다.
중앙은행 총재로서 국가경제라는 대의에 바탕한 기업·노동자·정부 등 경제주체들의 대승적인 타협이나 양보를 주문한 줄 알았더니, 정작 본인은 “원론적인 얘기”라며 주워 담기에 바빴던 것이다.
‘어느 한쪽에만 쓴소리를 하면 부담일 수 있을 테니, 여러 경제주체에 두루 한마디씩은 할 수 있지 않으냐’고 거듭 물었지만, 그는 “공자님 같은 얘기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앞으로 우리 경제의 장래를 내다보는 그런 성찰의 기회는 누구나 다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뜬구름 잡는 얘기만 반복됐다. 본인 스스로 ‘공자님 말씀’이라고 자인하니 할 말은 없지만, ‘역시나’ 하는 허무감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근 1997년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인기다. 영화에서 한은 통화정책팀장으로 나오는 여성 주인공은 경제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정부 고위 당국자와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당시 실제 상황과는 다른 설정이라지만,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며 공감하는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한쪽으로 휩쓸려갈 때, 다수가 불편해하더라도 할 말을 하는 한은 직원은 영화 같은 픽션에서만 가능한 얘기일까?
최근 국제금융계에서는 모디 인도 총리의 경기부양책에 반대하던 파텔 인도 중앙은행 총재의 사임이 화제가 됐다. 하지만 그가 사퇴하자 인도 루피화 가치가 더 떨어지는 등 정부에는 악재로 작용했다고 한다. 파텔 총재 같은 싸움닭은 아니더라도, 때가 되면 잠든 이들을 깨울 줄 아는 아침 닭이긴 해야 할 텐데….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워진다니 걱정이 앞선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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