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스위스에서 치러진 ‘주권화폐 국민투표’를 앞두고 지지자들이 ‘진짜 돈만 내 계좌에’라 적힌 조형물 앞에서 홍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중앙은행이 신용화페 창출 기능을 은행에서 빼앗아 독점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난 6월 페이스북의 암호화폐 ‘리브라’ 발행 계획 발표 이후 화폐를 둘러싼 숱한 해설과 전망이 꼬리를 물고 있다. 기업과 정부 사이의 디지털화폐 패권 다툼이라는 시각도 난무한다. 하지만 현대자본주의 통화 체제를 깊숙이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극히 드물다. 최근 들어 부쩍 목소리를 높이는 ‘주권화폐’는 현행 화폐제도의 비밀을 풀 실마리다.
잠시 시계를 약 1년 전으로.
2018년 6월 스위스에선 조금 낯선 주제의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약 11만명의 국민발의 형식으로 열린 국민투표다. 국민발의안의 뼈대는 ‘정부(중앙은행)에 화폐 창출 독점권을 돌려주자’였다. 투표를 앞두고 금융계와 주류 경제학계는 기존 금융 질서에 대혼돈을 불러올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반대 목소리만 나온 건 아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또 다른 금융위기를 막을 현실적 대안”이라며 찬성과 지지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총 득표수는 44만2387표. 찬성표가 24.3%에 그쳐 제안은 부결됐다.
중앙은행에 화폐 창출 독점권을 돌려주자? 얼핏 보면 황당한 소리로 들리기 십상이다. 당연히(!) 중앙은행만 화폐를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인가? 현행 한국은행법만 봐도 ‘화폐의 발행권은 한국은행만 가진다’(제47조)고 명시돼 있다. 차근차근 숫자부터 살펴보자. 지난 5월 말 기준(말잔) 우리나라 시중에 돌아다니는 돈의 총량(광의통화·M2)은 2773조원 규모다. 민간이 보유한 현금에 요구불예금과 정기예금, 수시입출식예금뿐 아니라 각종 시장형 및 실적배당형 금융상품 등을 모두 더한 금액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화폐발행잔액은 119조원. 전체 화폐 총량 중 한은이 발행한 몫은 고작 4%란 얘기다. 과연 나머지 96%의 돈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신용화폐를 만드는 은행의 ‘마법’
수수께끼의 해답은 현대자본주의 통화 체제의 비밀에 숨어 있다. 순환(유통)의 관점에서 볼 때, 화폐는 서로 분리된 두 개의 ‘회로’ 내부를 돌아다닌다. 하나는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은행) 사이, 하나는 은행과 민간 경제주체(가계·기업) 사이의 회로다. 첫번째 회로에선 중앙은행이 발행한 통화를 금융기관에 공급하고 중앙은행에 개설된 은행 계좌를 무대로 은행 간 청산·결제가 이뤄진다. 가계와 기업을 상대로 한 예금과 대출, 송금 등 통상적 은행 업무는 모두 두번째 회로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다.
비밀 상자는 바로 두번째 회로에 들어 있다. 은행은 예금주가 언제든지 맡긴 돈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일정액을 지급준비금(지준금)으로 쌓아둔다. 부분지급준비금제도다. 만일 10%를 지준금으로 떼어놓는다 치자. 한 은행이 1000만원을 예금으로 받을 경우 대출 한도는 100만원(1000만원의 10%)을 뺀 900만원이다. 만일 900만원이 대출된다면 이 돈은 전체 은행 체제 안의 어떤 계좌에 예금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당연히 이번엔 810만원(900만원?90만원)이 또 다른 대출에 쓰인다. 이 과정이 계속 이어지면 전체 대출금은 9000만원(900만원/(1-0.9))까지 늘어난다. 시중에 9000만원의 돈이 저절로 늘어난 셈이다. 화폐를 독점 발행하는 주체는 중앙은행이지만(본원통화), 은행은 요술 부리듯 그보다 몇십배 많은 새로운 돈, 곧 신용화폐(은행화폐)를 만들어낸다.
현대자본주의 통화 체제에서 화폐를 독점 발행하는 주체는 중앙은행이지만(본원통화), 은행은 요술 부리듯 그보다 몇십배 많은 새로운 돈, 곧 신용화폐(은행화폐)를 만들어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은행에 보조금 쥐여주는 꼴”
문제는 은행의 신용화폐 창출 과정이 항상 대출(빚)의 형태를 띤다는 점. 은행을 거쳐 탄생한 화폐는 반드시 이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는 뜻도 된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와 결정적 차이다. 스위스 국민발의안이 “현대 신용화폐 창출 과정은 사회가 은행에 부당한 보조금(이자수익)을 쥐여주는 꼴”이라 비난한 이유다.
은행의 신용화폐 창출 기능을 아예 없애자는 스위스 국민발의안과 같은 주장은 흔히 ‘주권화폐’(sovereign money)란 이름으로 불린다. 구체적 방법으론 전액지급준비금제도(100% 지준제)가 꼽힌다. 지금처럼 은행이 예금주가 맡긴 돈의 일부만 지준금으로 떼어놓고 대출하는 게 아니라, 아예 예금액 전부를 쌓아두도록 강제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은행은 남의 돈(예금액)이 아니라 뮤추얼펀드나 투자금, 자기자본으로만 대출에 나서야 해 신용화폐 창출 기능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대신 은행 주머니로 들어가던 이자수익은 이제 공동체 몫이 된다. 정부는 만기와 이자 없는 영구채를, 중앙은행은 화폐를 발행해 둘을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중앙은행의 정부 계좌에 ‘신용’이 쌓이도록 한다. 정부가 통상 국채를 발행해 민간에서 돈을 꾸어 오는 현행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추가적인 이자나 적자 부담에서 벗어난 정부는 이 돈으로 기존 나랏빚을 상각하거나 감세 혹은 시민배당 지급 등의 방식으로 민간의 구매력을 끌어올릴 수도 있다. 돈의 쓰임새를 정하는 일은 정부가 맡되, 화폐 발행 규모는 중앙은행이 독립적으로 결정한다면 부작용이 없으리란 게 주권화폐 논자들의 생각이다. 본원통화와 신용화폐의 상대적 비중만 변할 뿐이므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지는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1930년대 ‘시카고 플랜’의 유산
주권화폐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최근 1~2년 사이에 불쑥 튀어나온 건 아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화폐이론 역사의 오랜 전통과도 잇닿아 있다. 1930년대 어빙 피셔를 중심으로 한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시카고 플랜’도 그중 하나다. 피셔 등은 전액지준제를 도입해 신용 팽창과 수축 사이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민간은행의 신용화폐 창출 기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것으로, 지난해 스위스 국민발의안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마치 극약처방과도 같은 이런 식의 급진적 해법들이 새삼 관심을 끄는 배경은 무엇일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후 10년’에 대한 성찰을 빼놓을 수 없다. 금융위기가 불거지자 주요 나라 중앙은행은 양적완화(QE)란 이름으로 국채는 물론 회사채와 주택담보대출(모기지)증권까지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기본원칙에서 벗어난 변칙 플레이, 이른바 비전통적 통화정책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원칙이 하나 있다. 바로 은행이라는 ‘우회로’를 통한 간접적 유동성 지원 방식이다. 결과는 어땠나? 중앙은행을 출발한 돈은 종착지인 실물부문 구석구석으로 흘러들기보다는 중간기착지인 자산시장을 맴돌며 자산가격 상승의 불쏘시개 노릇을 했다. 계층간 불평등만 키운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앙은행이 은행이라는 중간고리를 아예 건너뛰어 민간 경제주체에 직접 신용을 공급하자는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린 이유다.
개인에게도 중앙은행 계좌를 허하라
이참에 개인이나 기업도 중앙은행에 예금계좌를 개설할 수 있게 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모건 릭스 밴더빌트대 법학 교수가 주도해 지난해 내놓은 ‘모두를 위한 중앙은행’ 제안을 꼽을 수 있다. 미국 국민 모두에게 ‘페드어카운트’(FedAccount)란 이름의 중앙은행 계좌를 열어주자는 게 뼈대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일찌감치 개인과 기업의 중앙은행 계좌 개설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은행의 신용화폐 창출 기능을 강제로 제한하는 전액지준제와는 달리, 중앙은행과 민간은행의 자유경쟁을 촉진해 역할 조정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들이 보기에 중앙은행 계좌 방식은 이점이 적지 않다. 중앙은행 계좌에 넣어둔 돈은 파산 위험이 전혀 없는 ‘완전한 돈’으로, 일정 한도만 예금보호 대상인 은행예금과 다르다. 국민경제 차원의 기대효과도 크다. 신용 공급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늘어나 거시건전성에 보탬을 주고, 민간 실물경제 자극 효과가 크다는 점도 매력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 한 해 동안 중앙은행이 민간은행의 초과지준금에 지급한 이자는 385억달러(약 43조6600억원)에 이른다. 개인과 기업의 은행예금이 중앙은행 계좌로 옮겨오면 혜택은 개인과 기업 몫이 된다.
선례도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민간의 중앙은행 계좌 보유는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현재 스위스 중앙은행은 직원들에게 계좌 발급을 포함해 직불카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근본적인 수술을 요구하는 여러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는 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당장 법적 제약도 장벽이다. 한국은행법만 봐도, 제79조에서 ‘개인이나 법인 등 민간과 예금 또는 대출 거래를 하거나 민간의 채무를 표시하는 증권을 매입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무엇보다 단기(예금)와 장기(대출) 사이의 만기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는 은행의 긍정적 기능을 무시하긴 힘들다. 은행이 떠안은 역할이 지금보다 크게 줄어든다면 경제를 떠받치는 신용이 한순간에 경색될 우려도 높다.
“GDP 30%까지 디지털화폐 발행 가능”
과연 돌파구는 없는 걸까? 이와 관련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는 현대자본주의 통화 체제의 향방을 가늠할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란 중앙은행이 현재의 지폐나 주화와 달리 전자적 형태로 발행하는 별도의 화폐를 말한다. 특히 지난 6월 페이스북이 암호화폐 ‘리브라’ 발행 계획을 발표함에 따라, 그간 기초적인 검토 단계에만 머물던 여러 나라 중앙은행들의 행보가 수면 위로 올라올지 관심거리다.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국제결제은행(BIS) 총재도 지난달 “페북 리브라로 인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발행이 빨라질 것”이란 예상을 내놨다.
이론적으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가 지닌 잠재력은 작지 않다. 중앙은행이 모든 경제주체들의 계좌와 거래 정보를 보관·관리하는 일도 수월해진다. 현금 등 법정화폐와 교환이 보장된 새로운 무위험 금융자산인 까닭에 기존 은행예금의 대규모 이동을 불러올 여지도 있다. 또한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개인이나 기업에 디지털화폐를 일괄 공급하는 방식으로 중앙은행이 직접 개입할 공간도 생긴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뱅크오브잉글랜드는 중앙은행이 국내총생산(GDP)의 30% 수준까지 디지털화폐를 발행해도 거시경제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어림잡아 지난 10년간 주요 나라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로 쏟아부은 돈과 비슷한 규모다.
지난 6월 페이스북은 암호화폐 ‘리브라’ 발행 계획을 발표했다. 픽사베이
‘왕과 상인 싸움’의 부활을 넘어
오랜 인류 역사에서 화폐 발행 권력을 지닌 주체는 단둘이었다. 왕과 상인. 요즘 언어로 옮기자면 정부(중앙은행)와 시장(은행)이라 할 만하다. 페이스북의 리브라 발행 계획이 알려진 뒤, 디지털화폐 영토를 둘러싼 민간기업과 중앙은행의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식의 평가가 난무한다. 하지만 딱 절반만 진실이다. 현대자본주의 통화 체제의 진짜 얼굴은 중앙은행의 본원통화와 은행의 신용화폐가 ‘공존’하는 구조여서다. 절대 우위를 지닌 건 물론 신용화폐다. 실물화폐이건 디지털화폐이건 간에 관건은 신용화폐 중심의 현행 통화 체제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달려 있다. 뭐니 뭐니 해도 화폐는 한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은행과 통화 체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일 그들이 이해한다면 나는 당장 오늘 밤에 혁명이 일어나리라 생각한다.” 대공황이 한창이던 때 기업가 헨리 포드가 남긴 말은 화폐의 생산과 소비를 민주주의 원칙의 통제 아래 두는 진정한 화폐개혁이 왜 어려운지, 하지만 왜 반드시 필요한지를 빗댄, 시들지 않는 경구다.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