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가난한 이에게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주거비·의료비 등 필수생계비를 제외한 순수한 ‘가용소득’을 분석한 결과, 소득 하위 20%의 가계소비 여력이 나머지 80%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주최한 ‘가구소득 및 소비여력을 통해 본 소득주도성장의 성과와 과제’ 토론회에서 발표된 ‘필수생활비를 고려한 소비여력 분석’ 보고서를 보면, 2017년 기준 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용소득의 비율은 63.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위 20%인 5분위의 경우 여윳돈의 비율이 86.8%인 점을 고려하면 23%포인트에 가까운 격차다. 2017년 기준 5분위와 1분위의 연간 균등화 처분가능소득이 6453만원과 927만원으로 6.96배인점을 고려하면, 가용소득은 5601만원과 589만원으로 9.51배까지 벌어진다.
보고서는 시장소득에서 조세와 사회보장분담금 등을 제외한 처분가능소득에서 주거비와 의료비 등 가계의 비선택적인 지출을 제외한 소득분을 가용소득으로 계산했다. 2017년 기준 1분위의 주거비는 전체 처분가능소득의 20.1%를 차지했다. 5분위는 처분가능소득의 3.8%만 주거비로 썼다. 의료비 격차도 컸다. 1분위는 처분가능소득의 12.2%를 의료비로 썼고, 5분위는 2.9%만 의료비로 썼다. 저소득층 입장에서 분모 역할을 하는 처분가능소득이 적고, 건강·주거 불평등으로 인한 지출이 커 필수생계비 비율이 확대된 셈이다. 다만 교육비와 부채비용의 경우는 분위별 격차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 가구가 많은 1분위의 특성 탓에 교육비 지출이 많지 않고, 고소득층일수록 주택 구매 등 가계신용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고서에서 주목되는 것은 상위 80%인 2~5분위 가구와 하위 20% 가구를 뜻하는 1분위의 가용소득 사이에 선이 그어진다는 점이다.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용소득 비율이 5~2분위는 86.6~75.9% 사이에 촘촘하게 배치된 반면, 1분위는 2분위와 비교해도 12%포인트 이상 떨어져 있었다. 가계의 소비여력 측면에서만 본다면 1분위에게만 유독 현저한 격차가 나타나는 셈이다.
이런 격차는 고령화 등 복합적인 사회 현상이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인다. 보고서를 작성한 김기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급격한 고령화 추세와 함께 가족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부양 모델이 무너지는 가운데, 아직 복지 모델이 성숙되지 않아 노인 계층이 대거 빈곤층으로 유입된 결과로 보인다”며 “‘80대 20의 사회’가 굳어지지 않도록 노인과 저소득층을 염두에 둔 정책 설계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전체 한국 가구의 평균 가용소득 비율은 주요 국가와 비교할 때 양호한 편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거비와 의료비, 교육비 등을 제외한 평균 가용소득 비율은 한국이 79.4%로, 스웨덴(77.4%)·독일(74.2%)·일본(74.2%)·미국(70.0%) 등 비교 대상 국가들에 비해 가장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에만 있는 전세 제도 탓에 월세 지출이 낮은 편이고, 주거비에 포함되는 광열비(전기요금 등)도 정부의 가격 통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 가운데 최저 수준인 점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노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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