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실리콘밸리은행 점포. UPI 연합뉴스
미국 지역은행들의 유동성 부족 위기는 코로나19가 촉발한 가운데 연준의 물가 판단 오류 및 그에 따른 통화긴축 과속페달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20일 국내외 시장분석 보고서들을 종합하면,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가 극적으로 보여주듯 지난해 지속된 글로벌 시장금리 급등세로 각국 은행이 보유한 만기보유증권(주로 채권 및 모기지증권)의 미실현 평가손실 리스크가 본격 제기되고 있다.
미국 예금보험공사(FDIC)가 추정한 미국 내 은행들의 미실현 평가손실 총액은 지난해 말 기준 약 6200억달러에 이른다. 기업 및 금융회사의 보유증권(채권·주식)은 보유 목적과 기간에 따라 단기매매증권, 만기보유증권, 매도가능증권으로 분류된다.
신한투자증권은 “팬데믹 기간에 각국 은행권의 보유 국채 및 주택저당증권(MBS)이 확대됐고, 정책금리 급등세로 보유 채권의 금리가 상승(가격 하락)하고, 주택가격이 떨어지면서 은행권의 미실현 손실 규모가 크게 증가했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은행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으로 유형자기자본(자본완충력) 대비 만기보유증권 비중은 무려 602%로 과도하게 높다. 매도가능증권과 만기보유증권의 평가손실 규모가 클수록 다른 은행에 비해 예금 이탈과 자본 손실 압력이 더 커진다.
엔에이치(NH)투자증권은 “주요 신흥국 은행시스템에서 이 비율은 300%를 넘지 않는데, 아시아에서는 대만과 인도, 중남미에서는 우루과이에서 이 비중이 각각 250% 안팎으로 높은 편이다. 한국은 100% 정도로 안정적”이라며 “미국·유럽에 비해 아시아·중남미 신흥국은 통화긴축 강도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라서 높은 만기보유증권 리스크를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와 관련 신한투자증권은 미국 지역은행들이 고수익을 위해 회사채 같은 위험자산을 늘리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상환 만기(듀레이션)가 긴 국채·정부기관채·주택저당채권 보유를 늘려왔다고 분석했다.
미국 전체 상업은행의 총자산 대비 금융자산 비중은 약 24%인데, 보유 금융자산 중 50%가량은 주택저당채권이고, 약 30%는 국채·정부기관채로 구성돼 있다. 실리콘밸리은행의 경우 전체 예금 대비 금융자산 비중이 68%로, 팬데믹 이후 급속히 불어난 예금으로 상환 만기가 긴 장기 국채와 주택저당증권에 집중 투자했다. 이런 투자 쏠림이 연준의 급격한 통화긴축에 따라 대규모 미실현 손실로 이어진 셈이다. 신한투자증권은 “팬데믹 기간에 주입된 대규모 유동성이 은행의 과도한 금융자산(만기보유증권+매도가능증권) 확대로 연결됐다”며 미 연준은 이번 사태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미 중소은행들이 장기 국채 및 주택저당증권을 중심으로 금융자산을 늘려온 건 팬데믹과 연준의 대규모 유동성 공급 통화정책에서 비롯됐다. 팬데믹이 발발한 2020년 3월부터 통화긴축이 본격화하기 전인 2022년 2월까지 연준이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양적 완화)하면서 미국 상업은행의 예금액은 그 이전에 비해 약 1조7천억달러 증가했는데, 이 중에 8천억달러가 금융자산 매입에 쓰였다.
신한투자증권은 “미국 은행들이 불어난 예금을 대출보다는 국채 등 금융자산 매입에 활용했는데, 팬데믹으로 경제활동이 봉쇄되면서 기업·가계 대출이 정체되거나 감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준은 2021년 하반기까지만해도 제로금리 기조를 적어도 2023년말까지 유지하겠다고 강조했었다. 그러자 미국 은행마다 포트폴리오 구성에서 국채와 모기지증권을 중심으로 한 금융자산 매입을 전략적으로 선택해온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연준이 물가 흐름에 대한 판단 착오로 뒤늦게 가파른 통화긴축과 양적 긴축 고삐를 당길 수밖에 없게 됐고, 이 과정에서 은행들은 대규모로 늘려온 국채와 모기지증권에서 가치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특히 미국 은행들이 보유한 주택저당증권의 평균 상환만기는 팬데믹 초기에 1.28년까지 하락했으나 이후 급상승해 최근에는 6.0년에 이른다. 주택저당증권의 만기 확대는 곧 시장금리(채권금리) 상승에 따른 미실현 평가손실 위험이 커졌다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최근 유동성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금융기관들이 보유 국채를 내다 팔면서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가격은 더 하락하고, 보유 만기보유증권의 미실현 손실폭도 확대되는 경로를 밟고 있다.
한편 실리콘밸리은행 사태 이전부터 미국 은행들은 중소은행을 중심으로 자금 압박을 받고 있었다. 통화긴축이 빨라진 지난해 6월부터 중소은행의 재할인 창구 이용잔액은 월간 평균 47억달러로 증가했고, 실리콘밸리은행 사태 이후에는 850억달러로 급증했다. 재할인 창구는 중소은행들이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등을 담보로 연준으로부터 단기 유동성을 빌리는 곳으로, 은행들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조계완 선임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