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세계는 지금 ㅣ 실리콘밸리
세계는 지금 ㅣ 실리콘밸리
로이터 연합뉴스
영속하는 가치 찾기 그는 한 손을 턱에 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 앞에는 애플의 은색 맥북이 놓여있다. 한 입 베어 문 사과 문양이 선명한 노트북 컴퓨터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순간 나는 저 자리에 다른 노트북이 놓여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한다. 지금 내가 원고를 쓰고 있는 검은색 싱크패드였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레노버가 인수하기 전 IBM의 로고가 싱크패드에 박혀 있다면 또 어떨까. 한국 대기업의 제품을 대입하기도 하고, 중국과 대만의 노트북을 넣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죽음을 앞둔 스티브 잡스를 떠올린다.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잡스가 몰두한 작업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애플이 표상하는 가치가 영속되도록 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애플이 상징하는 무언가가 세대와 세대를 넘어 지속할 수 있도록 눈을 감는 순간까지 각별히 애쓰고 공을 들였다. 기업 활동으로 자신의 철학을 구현하려고 했던 잡스에게 애플 제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도구이자 수단이었다. 애플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일생을 선불교 수행자로 살아온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단도직입’이자 ‘정문일침’이었다. 그의 철학에 따라 지금도 애플 제품은 극단적으로 단순한 디자인을 고수하며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1997년 애플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잡스는 쿠퍼티노 본사에서 직원들에게 마케팅에 대해 강연한다. 7분 남짓한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강연에 따르면 잡스에게 마케팅은 ‘가치’에 대한 것이다. 그는 확신에 차서 말한다. 제품을 출시하는 기업으로서 사용자에게 수많은 정보를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기업이 표상하는 가치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하러 돌아온 창업자는 애플이 사용자의 가슴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명확히 하자고 직원들을 설득한다. 기업가로서 영속하는 가치를 찾고 회사 내에 심기 위해 평생 몰두한 사내의 젊은 시절이 새로이 다가온다. 잡스는 떠났지만 그가 새겨놓은 가치가 여전히 애플에 존재한다. _______
다르게 생각하라 앞서 언급한 마케팅 강연에서 잡스는 나이키의 사례를 든다. 나이키는 마케팅을 하면서 에어 매스나 에어 조던이 얼마나 뛰어난 신발인지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위대한 스포츠맨을 향한 존경심을 지속해서 표현한다. 사람들이 나이키 신발을 신고 생활하고 운동하면서 그들처럼 일상에서도 위대함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는 대학 시절 실패한 육상선수였다. 어쩔 수 없이 스포츠맨의 삶을 포기하고 스탠퍼드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남다른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취직하지 않고 회사를 만들기로 생각한 것이다.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 리본 스포츠를 설립하기 전 그가 품었던 비장한 마음가짐은 2016년 발간된 자서전 <슈독>(Shoe Dog) 도입부에 잘 나타나 있다.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가 2022년 12월2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미식축구를 관람하고 있다. Orlando Ramirez-유에스에이투데이 스포츠
끝없는 진리 탐구 필 나이트는 신발 회사를 세우기 전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통시적으로 인류가 지속한 위대한 탐험을 통해 신성함을 찾으려 했다. 그는 동양의 도(道), 그리스의 로고스(Logos), 힌두교의 주나 나(Janna), 불교의 다르마(Dharma), 기독교의 정신(Spirit)과 같은 개념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생각보다 짧고, 그 한정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세상에 태어난 흔적을 남기는 것이 그의 인생 전체를 꿰뚫는 목표였다. 나이트는 창업으로 이를 이루려 했다. 스티브 잡스 역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전기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생 대부분에 걸쳐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 우리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고 느꼈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또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자신의 목표가 아니었다고 못 박는다. 기업가로서 잡스는 끊임없이 나아가기를 원했다. 인간애가 흐르는 제품의 진화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잡스는 엔지니어를 예술가와 동일시했다. 훌륭한 전자제품은 탁월한 예술작품처럼 계속 진일보해야 한다고 믿은 그는 기업활동으로 진리를 추구했다. 아마존을 창업한 제프 베이조스도 마찬가지다. 아마존의 철학은 ‘첫날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베이조스는 아마존의 건물 이름을 ‘데이 원’(Day 1)으로 명명할 정도로 첫날 정신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아마존 설립 초기부터 호기심 넘치는 탐험가의 문화를 만들겠다는 확실한 비전을 품고 있었다. 2018년 4월 주주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도 “진정한 탐험가는 전문가가 되어도 처음 시작하는 때의 초심을 잃지 않는다”고 썼다. 베이조스는 항상 오늘을 첫날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크게 성장한 조직 전체에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첫날의 활기를 유지하는 것으로 봤다. 그에게 둘째 날은 무엇이었을까. 베이조스에 따르면, 둘째 날은 정체이고 무관심이며 극심한 쇠퇴로 이어질 뿐이다. 이후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베이조스의 말에서 구도자의 결기가 느껴진다. 기업활동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초심자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실리콘밸리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꼭 한 번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남다름을 추구하는 게 실리콘밸리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그저 실리콘밸리의 현상을 답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실리콘밸리를 배우려는 까닭은 또 하나의 아류를 지향해서가 아니라 실리콘밸리와 달라지고 궁극적으로 뛰어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영속하는 가치는 결코 누가 제시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탁월한 기업가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자신만의 가치를 찾기 위해 일평생 여정을 계속했다. 그렇다고 꼭 기업활동을 통해서만 진리를 갈구할 필요는 없다. 실리콘밸리가 태동한 1960~197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모토는 ‘일상생활의 혁명’이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여기에서 혁신을 실현할 수 있다. 직업인으로서 내게도 ‘여생의 첫날’이 시작됐다. 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renew@kotra.or.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