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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헤리리뷰

‘부자증세’ 버핏의 ‘은밀한 탈세’…상위 0.01% 대신 우리가 세금 낸다

등록 2023-11-13 09:44수정 2023-11-14 09:50

지난 22일 유럽연합조세관측소 발표
조세회피처에 개인 자산 10조 달러
달러. 게티이미지뱅크
달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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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살던 동네에 야채 가게가 있다. 품질은 좀 떨어지지만 마트보다 싸 손님이 항상 끊이질 않았다. 카드는 안 되고 현금만 받았지만 불평하는 사람 하나 못 봤다. 농산물을 취급하는 부가세 면세사업자란 걸 뒤늦게 알게 됐지만 현금으로만 거래가 이뤄지니 종합소득세 신고할 때 소득이 누락되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가곤 했다. 현금을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은 싼값에 살 수 있다는 매력에 참을 만 했고 주인 또한 카드 수수료를 아꼈다. 야채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통시장에 가끔 들르는 짬뽕 맛집이 있다. 계산할 때 주인은 어김없이 현금으로 하면 몇천 원씩 깎아주겠다고 한다. 지갑에 돈이 있을 때는 무조건 거래에 응한다. 탈세 공범이 되는 순간이다. 매출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가게여서 현찰로 거래할 때마다 카드 수수료를 아끼고 장부상 수입도 축소되겠구나 싶다. 목돈이 오가는 카센터에서는 ‘부당 거래’ 크기가 좀 커진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 아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진짜 큰 세금 도둑은 우리 눈에 잘 띠지 않는다. 시야를 확 넓혀 보자. 우리나라보다 훨씬 투명한 나라로 꼽히는 노르웨이와 덴마크,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에서 순 자산 4500만 달러(약 595억 원) 이상 보유한 상위 0.01% 가구가 자산 소득에 붙는 세금의 25~30%를 탈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나라에서 무작위 세무조사를 통해 적발되는 유통 전반 탈세율 3~5%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이는 지난 2019년 아네트 알스타세터 노르웨이생명과학대 교수와 닐스 요한네슨 코펜하겐대 교수, 가브리엘 쥐크만 버클리대 교수가 2009년 ‘스위스은행 고객정보 유출’과 2016년 이른바 ‘파나마 페이퍼스’를 통해 유출된 고객 정보, 조세 사면(tax amnesty) 데이터 등을 바탕으로 공동 연구한 결과다.

소득이 높으니 부자의 탈세 규모 또한 크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지만 소득에서 탈세가 차지하는 비중(탈세율)이 보통 사업소득자들보다 다섯배나 크다는 것은 뜻밖이다. 의외의 결과가 가능한 배경엔 조세회피처(Tax Haven)가 있다. 위 세 나라 국적 소유 자산 가운데 부자 상위 0.01%의 자산이 절반이나 되었다. 조세회피처는 부자 가운데서도 진짜 부자의 ‘놀이터’다. 사실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마땅히 해외에 숨길 재산도 없다.

지난달 22일 유럽연합조세관측소(EUTAX Observatory)가 발표한 ‘세계 탈세 보고서’를 보면 조세회피처에 보유한 가계 금융자산 규모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이른다. 약 10조 달러로 우리나라 지디피의 6배나 된다. 부자들이 케이맨 제도, 버뮤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저지섬, 바하마, 파나마, 스위스,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등 이른바 조세회피처에 왜 재산을 옮겨놓을까.

다국적 기업들이 조세회피처에 이익을 이전하면서 세수 손실이 전 세계 법인세의 10%에 이른다. 가브리엘 쥐크만 교수 발표자료 갈무리
다국적 기업들이 조세회피처에 이익을 이전하면서 세수 손실이 전 세계 법인세의 10%에 이른다. 가브리엘 쥐크만 교수 발표자료 갈무리

답은 분명하다. 재산을 더 불리기 위해서. 탈세 산업의 도움을 받아 부자들은 천문학적인 세금을 아낄 수 있다. 전 세계 부자를 유혹하는 조세회피처는 소득과 자산에 세금을 거의 매기지 않는다. 부자들의 역외 금융자산 가운데 대략 27%(세계 GDP의 3.2%)가 세금을 회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세회피처를 활용한 탈세의 역사는 소득세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바하마, 파나마, 뉴펀들랜드, 그밖에 세율이 낮고 기업에 대한 법적 규제가 느슨한 해외에 개인용 지주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조세 회피의 수단으로 삼는 행위.” 지금 들어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 말은 거의 한 세기 전인 1937년 미 루스벨트 대통령이 의회에서 한 연설의 일부다. 그는 새롭게 개발된 탈세 기법을 나열한 뒤 이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갑부들이 해외에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를 세워 보유 주식과 채권을 옮겨 배당과 이자에 붙는 세금을 회피하는 수법은 21세기에도 유전되고 있다. 이후 70년대까지 소득세 최고세율이 80% 안팎에서 높게 머물렀지만 탈세는 크게 횡행하지 않았다.

탈세가 꽃피운 건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들어서다. ‘정부가 문제’이자 ‘세금은 도둑질’이란 이념이 확산하면서 탈세와 이를 돕는 산업도 번창했다. 조세회피처에서 유령회사들이 우후죽순 세워졌다. 2016년 파나마에 있는 법률회사 모색 폰세카의 내부 자료 유출(파나마 페이퍼스)로 당시 이 회사 한 곳에서만 지구촌 곳곳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 21만 개를 설립한 게 드러났다.

이매뉴얼 사에즈와 가브리엘 쥐크만 버클리대 교수가 미 전체 가구를 소득 구간별로 내야 하는데 내지 않은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분석했더니 1973년에는 모든 소득 집단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2018년 그 비중이 노동계급이나 중산층은 10~12%지만 상위 0.01% 부자들은 20~25%에 이르렀다. 부자에게 세금 회피가 더욱 도드라진다.

부자들은 실제 소득에서 얼마나 세금으로 내는 걸까. 쥐크만 교수는 지난달 11일 ‘한겨레’가 주최한 아시아미래포럼 강연에서 미 전체 가구의 실효세율(세전 소득 대비 세금 비중)이 28%인데 반해 가장 부유한 400명의 경우 23% 아래로 떨어진다고 밝혔다. 그래프의 이러한 모양은 세 부담이 미국보다 큰 프랑스나 네덜란드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된다. 소득이 높아질수록 소폭 우상향하는 그래프는 억만장자 계층에 와서는 급하강한다.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상위 0.01% 이상 부자들이 소득 대비 내는 세금의 비중이 다른 계층에 비해 되레 줄어드는 모습. 가브리엘 쥐크만 교수 발표자료 갈무리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상위 0.01% 이상 부자들이 소득 대비 내는 세금의 비중이 다른 계층에 비해 되레 줄어드는 모습. 가브리엘 쥐크만 교수 발표자료 갈무리

그 의미는 소득 불평등 관점에서 아주 명확하다. 세금을 낸 뒤 격차가 좁혀지지 않거나 되레 더 커질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역진적’ 조세체계가 초래하는 불평등한 현실이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소득이 높을수록 더 높은 세율을 매겨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떼는 누진세 체계를 택한다. 덕택에 세금을 낸 뒤 대개 계층 간 소득 격차는 준다. 이에 더해 정부는 세금을 재원 삼아 소득이 적은 계층에게 현금 지원과 보조 등을 통해 세후 소득 격차를 더 좁힌다. 흔히 말하는 조세재정 역할이다. 그런데 부자들이 내야 할 세금을 덜 내면 조세 수입이 줄어 저소득층의 보건의료와 교육, 복지서비스와 혜택이 줄 수 있다. 또 부자들이 세금을 회피한 만큼 다른 누군가가 부담을 더 져야 한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투자 귀재 워런 버핏은 지난 2월 포브스 기준 세계에서 다섯 번째 돈이 많은 부자다. 그가 설립한 버크셔 해서웨이는 시가총액 기준 미 10대 기업 안에 든다. 2011년 그는 소득 가운데 세금 비중이 17.4%로 자신의 사무실 직원 평균(36%)보다 더 작다면서 부자치곤 이례적으로 부자증세를 주장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그의 이름을 따 연 100만 달러 이상 소득자는 중산층 가구보다 세금을 더 적게 내선 안 된다는 ‘버핏 룰’을 입법화하려 했으나 좌초했다.

버핏의 미담 뒤 불편한 진실이 있다. 미 탐사보도 매체 ‘프로퍼블리카’는 2년 전 미 국세청(IRS) 테이터를 입수해 버핏이 2014~2018년 총 2370만 달러(313억 원)의 세금을 냈다고 보도했다. 언뜻 많아 보이지만 같은 기간 그의 자산은 243억 달러(32조882억 원) 늘었다. 자산은 현재 1000억 달러가 넘는다. 자산 가치 증가액 대비 세금이 0.1%에 불과한 것은 그가 소득을 거의 실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2015년~2018년 연간 1160만~2500만 달러의 소득을 올렸다고 국세청에 신고했다. 자산에 견줘 미미한 액수다.

지난 2014년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워런 버핏(왼쪽)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 빌 게이츠가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버크셔해서웨이 연차 주주총회의 한 행사로 열린 환영회에서 탁구를 치고 있다. 오마하/로이터 뉴스1
지난 2014년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워런 버핏(왼쪽)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 빌 게이츠가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버크셔해서웨이 연차 주주총회의 한 행사로 열린 환영회에서 탁구를 치고 있다. 오마하/로이터 뉴스1

이익의 미실현은 억만장자들의 조세 회피 전략 가운데 하나다. 버핏은 버크셔가 이익을 내더라도 배당하지 않은 채 회사의 가치를 키워 세금을 거의 내지 않으면서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버핏 모델을 따라 메타(옛 페이스북), 테슬라도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자산을 증식해 법인이란 저장소에 보관해두면 세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사실상 개인회사인 지주회사를 활용해 자회사 이익을 배당으로 빨아들이면서 세금 없이 자산을 불릴 수 있는 나라들도 있다. 미국에서는 과세를 피할 수 없지만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부자들이 선호하는 조세회피 방법이다.

또 한축에서는 바닥을 향한 법인세 인하 경쟁과 조세회피처에 법인의 이익을 쌓아두는 거대한 흐름이 존재한다. 미 기업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익 가운데 40%가 본토로 향하지 않은 채 조세회피처에 정박해 있다. 지식 재산권, 로고, 기술사용료, 관리 및 컨설팅 등 온갖 명목으로 세금이 아주 적거나 없는 조세회피처에 적을 둔 자회사에 이익을 몰아준다. 지난해 기준 전 세계 ‘이익 이전’은 무려 1조 달러에 이른다. 이는 다국적 기업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전체 이익의 35%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익 이전을 통해 기업들이 내야 할 세금이 줄면서 세계 법인세 총액의 10%에 이르는 세수 손실이 빚어진다.

법인이 조세회피로 세금을 덜 내면 법인을 소유한 주주의 이익은 커진다. 하지만 기업 본사가 위치한 나라의 세입은 줄게 된다. 문제는 연쇄적으로 나타난다. 법인세 세수가 줄면 나라 살림 규모를 줄이지 않는 한 개인 소득세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트럼프의 법인세 감세 정책으로 미 연방 법인세는 대공황 이후 가장 낮은 지디피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1980년까지 40%가 넘던 법인세 최고세율은 지금 20%대 초반으로 낮아졌다. 1950년대 이후 지디피 대비 법인세수가 줄어드는 가운데 감세를 할 때마다 소득세의 비중이 커지는 모습을 보였다. 세 부담의 이전으로 기업과 그 소유주는 더 부자가 되지만 노동자와 중산 계층 다수는 더 가난해진다.

가브리엘 쥐크만 미 버클리대 교수가 지난달 11일 한겨레가 주최한 아시아미래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가브리엘 쥐크만 미 버클리대 교수가 지난달 11일 한겨레가 주최한 아시아미래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사에즈와 쥐크만 교수는 2년 전 함께 펴낸 책 ‘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에서 미국의 조세체계가 ‘거대한 역진적 비례세’ 구조라고 정의했다. 세금을 다 합쳐 놓고 보면 모든 소득 계층에 거의 비슷한 세율(평균 28%)이 적용된다고 밝혔다. 이러니 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미국에서 조세가 ’불평등의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실제 미국은 조세재정정책의 소득재분배 효과가 우리나라보다 다소 낫긴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바닥권이다.

세계 탈세 보고서는 “조세회피는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정책 선택의 문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제안한다. 하나는 자산 대비 세금이 0~0.5% 수준에 그치는 전 세계 억만장자들의 실효세율을 글로벌 최저한세를 도입해 2%까지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조세정의를 확보하고 불평등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안이다.

다른 하나는 다국적 기업의 이익에 매기는 글로벌 최저한세를 25%로 높이자는 제안이다. 두 정책을 통해 매년 각각 2500억 달러씩 총 5천억 달러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현실성 없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2021년 국제사회가 합의에 이르기 전 다국적 기업에 대한 글로벌 최저한세 15% 도입 논의 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제 100개 넘는 나라들이 동참하고 있다. 부유세도 일부이지만 시행하는 나라들이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적극적 감세 정책을 펴온 우리나라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류이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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