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인수위원회 건물 현관 입구에서 윤석열 당선자와 안철수 인수위원장 등이 현판식을 한 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3월18일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 출범 이후 연내 가상자산법 제정이 또 무산될지 모른다는 의견이 늘어나고 있다. 가상자산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 19일 열린 코인데스크코리아 국회 정책토론회 참석자 등의 의견을 중심으로 현황을 점검해봤다.
“가상자산의 모든 양상과 문제를 한꺼번에 규제하려 하기보다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강조한 투자자 보호 장치 등 핵심만 반영한 입법이라도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안수현 한국경제법학회 회장)
“시장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가상자산 불공정거래행위 규제에 집중한 원포인트(단건) 입법이라도 검토해야 합니다.”(이수환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
‘새 정부 디지털자산(가상자산) 정책의 쟁점과 전망’을 주제로 연 정책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연내 가상자산법 입법을 다양하게 모색했다.
이날 토론회는 국회 정무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 김병욱 의원과 국민의힘 간사 김희곤 의원이 공동주최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축사에서 “가상자산의 법적·제도적 정비를 여야가 함께 논의하는 것은 협치를 위해서도 뜻깊다”고 말했다.
가상자산 전문가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3월 대선 이후 “2022년은 가상자산 입법의 원년이 될 것”이라며 큰 기대를 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후보 시절인 1월19일 ‘가상자산 시장, 선정비 후과세’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 등 입법에 적극적인 공약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수위 출범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최근 업계와 학계에선 “인수위가 가상자산에 정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다” “인수위에서 가상자산이 사라진 것 같다”는 걱정을 나누고 있다. 기대가 불안으로 바뀐 셈이다.
국회 토론회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보였다. 김병욱 의원은 “국회에서 가상자산 입법이 속도가 나지 않고 있는데 국민의힘이 인수위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희곤 의원은 “우려되는 여러 문제들을 세밀하게 살피느라 시간이 좀 걸리고 있지만 이제부턴 입법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윤 당선인이 (가상자산법 입법에) 관심이 굉장히 많다”고 덧붙였다.
인수위에서 가상자산 정책은 최상목 인수위 경제1분과 간사와 1분과에 파견된 권대영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이 책임을 진다. 인수위 관계자는 26일 “(최 간사와 권 국장을 주축으로) 여러 구성원이 의견을 교환하며 (가상자산 정책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상자산 정책의 국정과제 채택에 대해선 “아직 거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수위 사정에 밝은 한 변호사는 “가상자산 정책이 국정과제에 포함된다 해도 국회에서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입법을 낙관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안에 가상자산법 입법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국회엔 가상자산 입법을 위한 13개 법안이 발의됐지만 11월 이후 논의가 멈췄다. 당시 정무위가 금융위원회에 법안 통합을 요청했고 아직 그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올해엔 9월 정기국회에서 정부 입법이 예상된다. 업계는 몇가지 이유로 입법만 기다리고 있다.
우선 가상자산 시장은 새 정부의 주요한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는 의견 때문이다. 글로벌 경영자문사 보스턴컨설팅그룹코리아 김윤주 파트너는 26일 “한국 가상자산 시장은 2026년에 1000조원 규모로 성장할 수 있고 4만명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며 “그걸 실현하기 위해선 가상자산법 입법이 최우선 과제이고 입법과 규제가 선행되지 않으면 시장과 생태계는 만들기 어렵다”고 했다.
두번째는 미국 등 세계 가상자산 시장과의 균형을 위해서다. 업계에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르면 올해 말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승인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기관투자가들이 대거 진입해 시장 규모가 엄청나게 커질 거라는 뜻이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이미 승인됐다. 정재욱 법무법인 주원 변호사는 “한국에서도 외국처럼 기존 금융기관들이 가상자산 시장에 점진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 창구 규제 해소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 이유는 대선 공약이다. 이유보다는 바람에 가깝다. 윤 당선자는 ‘가상자산 투자소득 5000만원까지 비과세’를 공약하면서 ‘선정비 후과세’ 원칙을 밝혔다. 과세를 위해서는 시장을 정비할 입법이 선행돼야 한다는 뜻이다. 한 가상자산거래소 관계자는 “새 정부에선 과세를 위해서라도 가상자산법 입법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창현 국민의힘 가상자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은 26일 “선정비 후과세 원칙은 여전히 중요하고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네거티브 규제(명확하게 금지하는 것 외에는 모두 허용하는 방식), 전담기구 설치, 국제화 추세 반영 등 규제와 정책 방향에 대해선 이날 토론회 의견이 시장의 기대와 비슷했다.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네거티브 규제는 민간 자율규제가 핵심이기 때문에 사고가 벌어진다면 강력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울 수 있는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가상자산 전담기구에 대해 “대통령 직속, 장관급 등 기구 위상을 지나치게 고민하기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전담기구를 설치한 이후에 시장의 진흥과 투자자 보호 정책을 펼치도록 운용하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가상자산 거래가 국경을 넘어 확산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만 국제적 흐름에 맞지 않는 고립된 규제를 고집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서희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는 “미국 등 해외에서처럼 한국에서도 가상자산 산업이 금융산업과 어떻게 결합하고 발전할 수 있을지가 중요한데 그 전제가 입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 이뤄진 규제의 긍정적인 효과에도 주목했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시장의 변화에 대해 “지난해 9월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가상자산 사업자들의 정부 신고가 이뤄진 뒤 불공정거래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며 “정부 신고 이후 시장이 점차 자정을 통해 성숙돼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조정희 법무법인 디코드 대표변호사는 입법과 규제의 중요성에 대해 “류현진 선수 같은 세계적인 투수도 야구 규칙이 없으면 공 하나도 던질 수 없을 것”이라며 “가상자산법 입법을 통해 규제만 명확하게 생긴다면 사업자들은 따르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불공정거래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과 업계 관계자들 모두 가상자산 정책의 새 정부 국정과제 채택 여부를 주목하고 있다. 인수위는 새달 3일 110개 국정과제를 발표한다.
전지성 코인데스크코리아 기자 jiseong@coindesk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