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 모습. 칸마다 차장이 배치돼 있다.
30분 정도 서는 역 앞에 선 반짝시장 모습. 지역 주민들이 훈제한 오물(바이칼호수의 대표적인 민물 생선)과 토마토 등을 판다.
지난 여름휴가 때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바이칼에 가다’를 신청해 다녀왔다. 인천공항서 러시아 극동함대가 포진해있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비행기로 가고, 거기서 우랄산맥을 눈앞에 둔 ‘유배문화의 도시’ 이르쿠츠크까지는 평균 시속 50㎞로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69시간이나 탔다. 이어 버스로 드넓은 숲과 풀밭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6시간 가량 달려 인공위성에서도 뚜렷하게 보인다는 바이칼호수에 닿은 뒤 배를 타고 호수 내 가장 큰 섬인 알혼섬으로 들어갔다. 돌아올 때는 다시 이르쿠츠크로 나온 뒤 비행기로 귀국했다.
총 7박8일의 이번 대장정에는 진행자를 포함해 70여명이 함께 했다. 나이로는 20대부터 80대까지 분포했고, 부부·친구·모녀·부자·직장동료·동창·자매·남매·고부 등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이 함께 했다. 북한 벌목공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뉴스와 다큐멘터리에서나 들었던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알혼섬’ 등 오지를 대표하는 것 같은 지명에 출발 전부터 설레었고, 3일 가까이 연속 기차를 타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창 밖 풍경과 알혼섬의 원시적인 경관은 지금도 내 몸에 ‘기운’으로 물들어있는 느낌이다. 이번 대장정 책임자로 함께 간 강태호 통일문화연구소장은 이 느낌을 “시베리아의 자연이 내 눈과 몸에 물들었다”고 표현했다.
한겨레에서 25년 가까이 통신분야를 담당해온 기자의 ‘직업병’ 탓일까. 여행 준비를 하던 중 문득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도 이동통신이나 무선랜(와이파이)이 터질까?’가 궁금해졌다. 진행을 맡은 여행사 가이드한테 물어보니 역시 안터진단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호수로 가는 길과 알혼섬도 대부분 ‘노 서비스’ 지역이란다.
우리나라는 무인도와 지리산 꼭대기에서도 이동통신이 잘 터진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마트폰 중독’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다. 이런 환경에서 생활하던 ‘한국사람’들이 갑자기 이동통신과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에 며칠이나 놓여지면 어떤 행태를 보일까. 이번 여행에서 나만의 관전 포인트였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출발하는 순간부터 스마트폰의 안테나 모양을 살폈다. 두시간쯤 지나자 안테나가 사라졌다. 이동통신이 안터지는 지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후 나는 적어도 열차를 타고 있던 3일 동안은 휴대전화 벨소리와 메신저 도착 알림 소리에서 완전히 해방됐다. 참가자 가운데 누군가는 “케이티엑스(KTX)에서는 와이파이가 되는데, 서비스가 왜 이 모양이냐”고 투덜댈 줄 알았는데 모두 조용했다. ‘방 메이트’(기차에선 4명이 한 방을 쓴다)들한테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안터지니 좋네. 당연히 안되야지”라는 반응이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휴대전화 벨소리나 메신저 도착 알림 소리가 들리면, 잽싸게 받거나 확인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벨소리가 몇번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거나, 메시지를 늦게 확인하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실제로 ‘왜 전화를 늦게 받느냐’ 내지 ‘메신저 쫌 빨리 확인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식사를 하거나 누군가와 얘기를 나눌 때도 휴대전화에 촉각을 기울이고, 잠을 잘 때도 옆에 둔다. 이동통신 품질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습관까지 ‘애니콜’ 경지에 오른 꼴이다.
알혼섬의 샤먼 상징물. 알혼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데는 ‘빨리빨리’와 유교문화 등 여러가지 사회·문화적인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이동통신 사업자들의 마케팅 전략도 한몫 했다. 미국 등 일부 나라는 전화를 건 쪽과 받는 쪽이 통화료를 분담한다. 전화를 받는 쪽도 요금을 내다 보니, 발신번호를 확인해 모르는 번호일 때 등에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에 통화 성공율이 낮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화를 건 쪽이 통화료를 전액 부담한다. 이게 전화를 받아주는 인심을 후하게 만들고, 전화를 안받거나 늦게 받으면 괘씸하게 여기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재밌는 사실은, 이동통신의 발신번호 확인 기능이 미국 등의 통화료 쌍방 과금체계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송·수신자 양쪽에 통화료를 분담시키려면 수신자의 통화 결정권을 보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게 발신번호 확인 기능아다. 그런데 우리나라 이동통신 사업자들은 이동통신망에 기본 탑재돼 있던 이 기능을 처음에는 덮어놨다가 뒤늦게 ‘발신자전화번호표시(CID) 서비스’란 이름으로 활성화하면서 가입자당 월 2500원씩 챙겼다. 이 기능이 통화 거절을 유발해 통화 매출이 줄기 때문에 유료로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댔다.
기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출발한 뒤 3~4시간이 지나자 스마트폰의 용도는 창밖 풍경을 찍는 카메라로 바뀌었다. 동시에 여행 참가자간에 말문이 트이고, 교류가 시작됐다. 함께 간 아내가 발목을 만지며 며칠 전 접질렸는데 불편하다고 하자, 울산에서 왔다는 또래 방메이트가 “내가 수지침을 배웠는데 봐 드릴까요”하더니 서슴없이 아내의 발을 끌어가 주무른다. 돈을 안받으니 불법은 아니란다. 뜸 뜨는 냄새가 복도를 오가던 다른 방 사람들을 불러들였고, 다른 방메이트가 여행가방을 들썩이더니 소주팩을 꺼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몇군데 역에서는 20~30여분씩 쉬었다가 가는데, 역 앞에 특산물을 파는 반짝 시장이 열리거나 지역 주민들이 먹을꺼리를 들고 플랫폼 안으로 들어와 팔기도 한다. 이런 역에 섰다가 출발할 때마다 기차 안에서는 새로운 현지 음식에 대한 도전이 이뤄진다. 이러면서 바이칼호수에 도착하자, 참가자들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안부를 묻게 됐고, 알혼섬에서는 함께 언덕을 올라 보드카를 마시며 별을 구경하기도 했다.
기차에서 와이파이가 됐다면 어땠을까. 엄마와 함께 온 20대 딸은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대에서 스마트폰과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40대 직장인은 회사 메신저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베리아에 가서까지 일에 매달라지 않았을까 싶다. 이동통신과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게 누군가에게는, 어떤 시점에서는 불편한 게 아니라 해방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빅데이터 분석 전문업체인 다음소프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디지털 기기를 일부러 멀리 하는 ‘디지털 디톡스’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스마트폰 중독’ 언급량이 2015년 2만9255건에서 2016년 3만8652건으로 늘었고, 올해 들어서는 지난 8월까지만도 3만2582건에 달했다. ‘디지털 단식’, ‘인터넷 피로’, ‘디지털 피곤’ 등에 대한 언급량도 급증하고 있다. 급기야 ‘퇴근 후 카톡금지법’까지 발의됐다.
요즘도 식당·카페·주유소 등에서 ‘와이파이 가능’이란 문구를 흔히 본다. 하지만 연결 안될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흐름으로 볼 때, 머지않아 산 속 휴양림이나 펜션 등에서는 거꾸로 ‘이동통신과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희망한다.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