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욱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장이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운니동 한국문화정품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메모리(반도체) 호황에만 의지하다 반도체 생태계가 없어지면 어쩌나, 업계 후배들 호소가 끊이질 않아요.”
노화욱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장은 13일 <한겨레>와 만나 반도체업계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현대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에서 20년 간 인사·노무를 담당한 그는 중소 협력사들의 수많은 계약·납품 관련 투서(익명제보)를 받았다. 충북도 정무부지사를 지낼 땐 ‘취업할 곳이 없다’는 반도체 대기업 퇴직자들의 하소연을 접했고 극동대 석좌교수가 된 뒤론 ‘전공 살릴 데가 없다’는 지방대 반도체 전공 학생들을 만났다. 이를 통해 그가 확인한 것은 메모리 반도체 명성과 견줘 초라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반도체 생태계였다.
‘소부장’ 살아야 반도체 생태계도 산다
노 회장은 반도체 대기업이 창출한 자원과 인재를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려면 후방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에스케이하이닉스가 수십조원 매출을 올렸다고 하면 국민들은 ‘나라 경제에 기여한다’며 환호합니다. 매출 상당수는 소재·장비를 납품하는 외국기업에 흘러들어 가는데도요. 이런 구조라면 반도체 초호황이 다시 와도 한국 기업이 아닌 외국 기업이 그 결실을 나눠 가질 겁니다.”
2018년 기준 에스케이하이닉스는 40조원 매출을 올렸으나 원재료 및 기계장치 구매에 23조원(57%)을 썼고 삼성전자도 같은 시기 243조원 매출을 냈으나 원재료 및 제품 구매에 47조원(19%)을 썼다. 이들의 주요 소부장 협력사는 미국과 일본 기업이다.
노 회장은 또 “10년 이상 기술과 경험을 축적한 대기업 엔지니어들이 매년 수백명씩 쏟아져 나오는데 소부장 생태계가 부실하니 갈 곳이 없다”며 “하청회사에 재취업하거나 회사를 차려도 출신 기업에 홀대 받고 좌절하거나 중국에 진출했다가 매국노라고 매도당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의 메모리 중심 생태계로는 이들의 우수한 능력과 경험을 조직화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중국의 빠른 추격도 반도체 생태계 구축이 필요한 이유라고 그는 강조한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에 메모리 반도체 패권을 빼앗긴 뒤에도 20년 동안 소재와 장비로 먹고산다. 중국에 추격당할 가능성이 높은 한국도 미리 후방산업을 키워놓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 정부는 지난 2014년부터 국부펀드와 기금을 조성해 중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디램은 아직 양산 준비 단계지만 낸드플래시는 지난해 하반기 양산에 성공했다.
‘메모리 강국’ 인프라로 소부장 키우자
그는 ‘한국 소부장 기업들의 기술 성장이 더디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래서만은 아니다. 외국 기업들만큼 납품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한 탓도 있다”고 짚었다. 노 회장은 하이닉스반도체 재직 시절 받은 투서 상당수가 자사의 계약·납품 차별 사례였다며 “외국 브랜드 기업엔 독점 납품(전속거래)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한국 기업엔 요구한다거나 특정 외국기업을 미리 선정해 놓고도 가격 협상을 위해 한국 기업들을 사업 수주전에 참여시키는 경우가 잦았다”고 했다. 그는 “법과 제도가 정비되면서 과거보다 불공정거래가 줄었다지만 전속거래와 단가 인하 압박은 아직도 엄연히 존재한다”고 했다.
노 회장은 한국 소부장 육성의 최우선 조건으로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를 이끌고 있는 그룹 총수의 역할을 꼽았다. 노 회장은 “대기업 의사결정이 효율적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새 제품을 시험했을 때의 위험이 성과보다 크기 때문에 구매팀과 엔지니어들은 기존 제품만 쓰려는 관성이 있다”며 “그룹 총수가 나서 직원 성과지표에 국산화를 반영한다거나 일부 공정에 국산을 시험해 보는 등 구체적으로 독려해야 조직이 바뀐다”고 강조했다.
경쟁사 많아졌는데…정부 육성 효과 낼까
지난해 일본 수출 규제 강화를 계기로 국내 대기업도 일본 외 기업들에 통로를 열었다. 하지만 그만큼 경쟁사들도 안팎으로 속속 생겨나고 있다. 노 회장은 최근 산업통상자원부가 글로벌화학기업 듀폰의 한국 진출을 도운 사실과 관련해 “기업의 판단에 맡겼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국내 소부장 기업은 납품 기회를 얻기 더 어려워졌다”이라고 평가했다. 또 에스케이하이닉스의 수직계열화 행보에 대해서도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 키운 꿈나무(소부장 기업)가 생존할 땅이 없어진다.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역할을 분담하고 중소기업 전문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에스케이그룹은 최근 계열사를 통해 블랭크마스크, 슬러리, 포토레지스트 등 중견기업이 만들던 반도체 소재 산업에 진출하고 있다.
노 회장이 본 소부장 육성의 골든 타임은 두 대기업이 세계 1,2위 타이틀을 유지하는 기간이라고 말한다. 대략 앞으로 15∼20년 정도의 시간이라고 그는 본다. “국내 대기업이 처음 반도체를 만들 땐 검증된 재료와 장비로 하루빨리 미국, 일본을 따라잡아야 했다. 이제는 정상으로 올라섰고 소부장 기업들과 동반성장할 수 있다. 1등 열차에 동승하는 이류는 목적지에서는 일류가 될 수 있다.”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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