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백악관이 반도체 공급 자질을 이유로 삼성전자·제너럴모터스 등 주요 반도체·완성차 업체들과 함께 긴급 대책회의를 연다.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트럼프 전 행정부와 유사한 ‘자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 품귀현상을 반도체 미국 내 생산 확대의 계기로 삼는 모양새다. 실제 이번 회의에선 반도체 공급망 사슬(Supply Chain)이 중점 논의 대상에 오를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가안보보좌관 등 주재, 반도체 긴급 회의
2일 미 매체 <블룸버그> 등을 보면, 미 백악관의 안보 및 경제 관련 고위 관리들은 오는 12일 반도체 업체 및 자동차 업체 회사 관계자들과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논의한다. 제너럴모터스(GM)와 글로벌파운드리 등 미국 내 주요 제조업체들이 참석한다. 메모리반도체 시장 1위이며 미 현지에서 비메모리반도체를 생산하는 삼성전자도 초청받았다. 미 정부에선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과 브리언 디즈 국가경제위원회 국장이 참석한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미 정부의 한 관리는 미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반도체 부족 사태와 관련해 의회 및 동맹국들과도 협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긴급회의 개최 배경은 미 정부가 밝힌 대로 세계적인 반도체 품귀 현상과 맞닿아 있다. 특히 전체 경제에서 미치는 영향이 큰 자동차에 들어가는 비메모리반도체 공급 차질이 최근 3~4개월 간 심각해지면서 자동차 부품업체와 같은 관련 산업과 기업으로 확산 중이었다. ‘반도체 품귀→자동차 생산 차질→고용 및 경제 회복 둔화의 음울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품귀 현상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다. 우선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하던 업체들은 지난해 코로나19 충격으로 자동차 생산이 크게 줄어드는 현상을 목격하며 피시(PC)나 모바일용 반도체의 생산 비중을 끌어올렸다. 비대면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수요가 급증한 전자회사 쪽으로 판로를 갈아타면서 차량용 반도체 공급 능력을 줄여왔다는 뜻이다.
여기에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 등이 핵심 차량용 반도체 생산 시설이 있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면서 반도체 대란의 기폭제가 됐다. 미 텍사스주에 위치한 삼성전자·엔엑스피(NXP)·인피니온의 공장은 기록적 한파에 따른 전력 차단과 수도관 동파 탓에 지난 2~3월 가동을 멈추는 등 심각한 생산 차질을 빚었다. 앞서 지난해 10월엔 일본 미야자키현에 발생한 화재로 아사히 카세이 공장이 멈췄고, 올해 1월엔 지진 탓에 일본 아라바키현의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 공장이 멈췄다. 세계 최대 비메모리반도체 생산 회사인 대만의 티에스엠시(TSMC)도 지난 2~3월 가뭄에 따른 물부족을 호소하며 생산 감축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 회사는 지난 1일 대량 주문에도 할인 판매는 없다며 사실상 가격 인상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공급자 우위 시장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 단면이다. 비메모리반도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주요 기업 중 생산 차질을 피해간 곳은 거의 없다.
우연이 촉발한 공급 부족은 최소 수개월 더 걸린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는 반도체의 특수성 탓이다. 반도체는 생산이 일시 멈추게 될 경우 원재료 상당부분을 폐기해야할 뿐만 아니라 팹(fab)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식은 용광로를 되살리는데 수개월 걸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일부 시장 전문가들은 천재지변 등으로 타격을 입은 반도체 공장들이 정상 수준의 생산력까지 회복하는 데 최소 2개월이 더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이런 이유로 한국 정부도 지난달 초 ‘미래차-반도체 연대·협력 협의체’를 발족하며 차량용 반도체 생산 차질 사태에 대한 대응에 이미 나선 상황이지만 반도체 통관 절차 간소화 수준의 임기응변에 머문 대책만 내놓은 채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바이든의 노림수?…반도체 대란을 자국 생산 확대로 활용하나
미 백악관이 직접 대응에 나선 데는 또다른 포석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전 행정부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경제 영역 만큼은 자국 우선주의를 강조하는 바이든 행정부가 자율주행·인공지능 등 미래 산업의 씨앗이 될 비메모리반도체의 자국내 생산을 확대하려는 계획 속에 긴급 회의를 기획했다는 얘기다. 이번 논의를 주재하는 백악관 관리가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라는 점이 이런 추정에 설득력을 싣는다. 미 정부가 세부 논의 주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등 미 외신들은 “반도체 공급망 사슬을 집중 검토하면서 취약점을 찾는 게 이번 회의의 핵심”이라는 취지의 보도를 내놓고 있다. 실제 이 회의에 앞서 미 정부는 은밀하게 여러 가상 시나리오를 토대로 공급망 사슬의 취약점을 살펴보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진행했다.
이런 분석이 나오는 배경 중 하나는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 자국 생산 능력 확충을 위해 한발 한발 내딛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 예가 지난달 31일 미 정부가 대규모 증세 계획과 함께 공개한 ‘인프라 투자 계획’(American Jobs Plan)이다. 미 정부와 민간이 경기 부양과 고용 회복을 위해 미 국내총생산(GDP)의 10%에 해당하는 2조2천억달러의 투자에 나선다는 이 계획의 한 축은 ‘제조업 및 연구개발(R&D) 투자’로 여기에 ‘반도체 제조와 연구 지원’(Chip Act) 부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부문에 배정된 투자 규모는 모두 500억달러(우리돈 약 56조원)에 이른다. 올해 한국 정부의 예산(약 558조원)의 10%에 이르는 재원을 반도체 분야에 쏟아붓는다는 공격적인 계획인 셈이다.
물론 이런 계획이 현실화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민간과 함께 하는 투자이지만 정부의 대규모 재정 지출이 동반되는 터라 예산 조정을 위한 미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여기에다 정부가 특정 시장에 공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한 시장의 암묵적 반발이나 이런 개입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국제신용평기기관인 피치의 로먼 쇼어(Roman Schorr) 애널리스트(자동차 산업 담당)는 <시엔비시>(CNBC)와 한 인터뷰에서 “정부의 정책 개입(policy actions)은 장기적 관점에선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반도체칩 수급 불균형은 시장의 문제”라고 말했다. 금융 시장에서 종종 나타나는 유동성 위기와 같은 상황에선 정부와 중앙은행이 긴급 자금을 공급하거나 장기 산업 전략 관점에서 특정 부문에 보조금을 주는 수준의 시장 개입은 타당하지만 시장에서 종종 나타나는 부품 수급불균형에도 정부가 공격적 개입에 나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거나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