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2017년 8월 말 세종시 공정거래위원회의 구내식당을 깜짝 방문했다. 이때 타고 온 관용차는 독일 베엠베(BMW)의 7시리즈였다.
베엠베 7시리즈의 제원상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주행거리 1km당 150∼181g. 청와대에서 세종시 공정위까지 이동하며 공기 중에 쏟아낸 이산화탄소는 최대 25kg가량으로, 경차인 기아 모닝의 1.7배에 이른다.
정부가 탄소 배출 줄이기 정책을 적극 추진하지만, 정작 고위 관료가 이용하는 관용차 대다수는 이처럼 전기차는 아니다. 예를 들어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기재부 1·2차관은 모두 현대차 그랜저 하이브리드(내연기관 엔진에 전기모터를 단 차)를 관용차로 탄다.
문 대통령과 일부 장관들이 현대차의 수소 전기차인 넥쏘를 관용차로 들였으나 정의용 외교부 장관 등은 뒷좌석이 좁다며 여전히 대형 내연기관 차를 고집한다. ‘자동차광’으로 알려진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전후 정부 관용차 등 공공기관 차량 300만대를 모두 전기차로 바꾸겠다고 약속한 것과 비교된다.
국내 관료들의 ‘내연기관 사랑’엔 핑곗거리가 있다. 시중에 출시된 국산 대형 승용차 중 순수 전기차가 없다는 이유다. 현대차가 최근 선보인 고급 차 브랜드 제네시스의 첫 전기차는 이런 공백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정부 고위직 중 관용차를 제네시스 전기차로 바꾸려는 수요가 많을 것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마케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내 관용차는 지난 5월 현재 모두 9만4천여대, 이중 승용차는 3대 중 1대꼴인 3만3천여대다. 중앙행정기관과 각종 위원회 등 ‘공용 차량 관리 규정’을 적용받는 기관 71개와 공기업 및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 부문에서 이용하는 차량을 모두 합친 숫자다.
규정상 전용 승용차를 배정받는 각 부처 장·차관과 청장, 차관급 공무원 그리고 지자체장 등이 타는 관용 대형차 수는 1천여 대를 훌쩍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발맞추겠다며 전기차로 갈아타려는 민간 기업의 교체 수요까지 더하면 국산 고급 전기차 ‘독점 공급자’인 현대차도 장사할 만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위) 제네시스 G80 바닥에 배터리가 깔리며 운전석 바닥면이 일반 차량보다 올라와 있다. (아래) 차량 앞 엔진룸과 뒤 트렁크 공간에는 전기모터가 들어가 있다.
지난 7일 타본 현대차의 제네시스 G80 전기차는 고위직이 선호하는 고급 내·외장재와 각종 편의 장비, 안락함을 두루 갖췄다. 벤츠 S클래스 등에 적용하는 ‘고스트 도어 클로징’(차량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기능)은 물론,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승차감을 만드는 전자 제어 방식 현가장치(서스펜션), 뒷좌석 열선 가죽 시트와 대형 화면 등을 적용했다.
전기차인 데다 외부 소음을 차단하는 이중 접합 차음 유리를 사용해 차량 실내는 상당히 정숙하다. 반면 전기모터를 차 앞뒤에 2개 얹어 미국 전기차 테슬라 못지않은 가속 등 주행 성능을 발휘한다. 최고급 전기차로서 상품성을 갖췄다는 얘기다.
문제는 가격이다. 제네시스 G80 전기차의 기본 가격은 8281만원으로, 종전 내연기관 G80 차량보다 최대 3천만원가량 비싸다. 고스트 도어 클로징 등 선택 사양을 더한 시승 차 가격은 9651만원으로 1억원에 육박한다. 국민 세금을 공무원 비싼 차 타는데 썼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셈이다.
또 막상 G80 전기차의 뒷좌석에 타보면 생각보다 불편하다고 느낄 가능성도 있다. 이 차량이 애초 전기차를 염두에 두고 설계한 것이 아니라 기존 내연기관 엔진을 가진 차량을 전기차로 개조한 것이어서다.
기존 G80엔 없던 배터리가 자동차 밑에 두껍게 깔리며 차 바닥 면이 전반적으로 올라와 시트와 바닥 사이 길이도 대폭 짧아졌다. 이로 인해 뒷좌석에 앉으면 무릎이 90도 미만으로 접히고 앞좌석 하단의 여유 공간이 없어 발을 앞으로 쭉 뻗기도 어렵다.
“넥쏘 뒷좌석이 좁아서 못 타겠다”던 정의용 장관 등이 관용차를 G80 전기차로 선뜻 교체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제네시스 G80 전기차의 실내 공간을 어림할 수 있는 축간거리(휠베이스·앞바퀴 중심과 뒷바퀴 중심 사이 거리)는 3.01m로 넥쏘(2.79m)보다 22cm 길다. 하지만 차 뒤쪽에도 모터를 넣으며 뒷좌석 무릎 공간이 현대차 그랜저나 기아 K8보다도 훨씬 좁아졌다.
특히 G80 전기차 바닥에 배터리를 깔아 뒷좌석의 위아래 공간이 함께 쪼그라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넥쏘의 뒷좌석 여유 공간 부족을 이유로 G80 전기차로 갈아탈 명분이 사실상 없다. 넥쏘의 축간거리는 현대차의 대형 승용차인 그랜저보다 9.5cm 짧은 정도다.
다만 현행 규정상 고위직 관료가 관용차를 G80 전기차로 갈아타는 데 제도적인 걸림돌은 없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과거에 만들었던 공용 차량의 배기량 제한이 없어졌고 마찬가지로 별도의 가격 제한도 없는 상황”이라며 “각 기관이 자율적으로 판단해 예산 범위에서 차를 구매하면 된다”고 말했다.
각 부처 장·차관 등이 타는 전용 승용차는 규정상 차량 등록일이 9년을 넘고 주행 거리가 12만km를 초과해야 새 차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렌트와 리스 차량은 이 같은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다.
글·사진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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