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 휠체어’ 개발에 현대차·스타트업 의기투합 휠체어에 부품 붙여 개조…가격 낮추고 소비자 접근성 높여
지난 15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송영욱 튠잇 대표(왼쪽부터), 권영진 현대차그룹 제로원 책임매니저, 박동현 하이코어 대표가 자율주행 휠체어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현대차 제공
얼마 전의 일이다. 기자의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걷기가 어렵다는 거다. 평소 거동에 불편이 없는 분이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휠체어가 필요한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전기를 이용해 굴러가는 전동 휠체어는 알고 보면 불편한 점이 많다. 누군가에겐 조작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적지 않다. 만약 목적지까지 알아서 가주는 휠체어가 있다면 어떨까.
방법이 있다. 자율주행이다. “자동차의 자율주행 기술은 비장애인 중심이죠. 이 기술을 장애인, 고령자 등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돕는 데 접목하고 싶었어요.”
권영진 현대차 책임매니저는 ‘자율주행 휠체어’ 개발에 뛰어든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권 매니저는 현대차그룹의 개방형 혁신 플랫폼인 ‘제로원’에서 자율주행 기술을 활용한 휠체어를 만들고 있다. 박동현 하이코어 대표, 송영욱 튠잇 대표가 힘을 보탰다.
지난 15일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들이 만든 휠체어 시연회를 했다.
“제가 길을 막아볼 테니 잘 보세요.” 박동현 대표가 목적지를 향해 혼자 바퀴를 굴리는 휠체어 앞을 이리저리 오가며 가로막았다. 그러자 휠체어는 그를 피해 스스로 길을 찾아 주행했다.
휠체어 자율주행의 비밀은 의자 팔 받침대에 부착한 2개의 라이다 센서에 있다. 이 센서가 휠체어의 앞뒤 좌우로 레이저를 쏘아 장애물을 인식하면 휠체어에 탑재한 미니컴퓨터가 다른 길을 찾아 조작부를 자동으로 제어한다. 자동차 자율주행과 비슷하다.
이용은 간편하다. 휠체어 팔걸이 앞에 붙은 휴대전화 모양의 액정에 원하는 목적지를 찍으면 지도를 따라 휠체어가 알아서 길을 간다. 휠체어 뒤쪽에도 대형 액정 화면이 붙어 있다. 송영욱 대표는 “사람이 앉지 않은 채 휠체어 혼자 다닐 때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하지 않도록 화면에 안내문을 띄우는 것”이라고 했다.
자율주행 휠체어를 개발하는 건 이들이 처음이 아니다. 다만 제로원 팀이 만드는 제품엔 남다른 점이 있다. 이들은 자율주행 휠체어를 뼈대부터 새로 설계하고 만들지 않았다. 기존 휠체어에 바퀴·컴퓨터 보드 등 부품 뭉치(모듈)를 장착해 자율주행 휠체어로 탈바꿈하는 방법을 썼다. 호환성이 있다는 얘기다. 현재 저가의 수동 휠체어를 사용 중이라면 비싼 새 휠체어를 살 필요가 없다.
박 대표는 “지난해 접이식 수동 휠체어에 전기 모터와 변속기를 내장한 바퀴를 달아 무게를 줄이고 에너지 효율은 높인 전동 휠체어를 먼저 개발했다”며 “여기에 자율주행 부품을 추가로 장착하면 기존 휠체어를 계속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시중에서 판매 중인 전동 휠체어는 무게가 100kg이 넘는다. 그래서 휴대성이 높지 않다. 무거운 휠체어를 굴리기 위해 용량이 큰 배터리를 쓰다 보니 항공 운송 규정에 걸려 비행기에도 싣지 못한다.
반면 제로원 팀이 지난해 만든 전동 휠체어는 무게가 27kg으로 기존 제품의 4분의 1 정도다. 작고 가벼운 모터와 배터리를 쓴 덕분이다. 모터와 변속기가 들어간 일체형 바퀴를 사용해 구동력을 손실 없이 바퀴에 직접 전달하다 보니 더 적은 에너지로도 휠체어를 굴릴 수 있게 됐다.
실제로 이 휠체어는 기자가 들기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배터리를 완속 충전기로 3시간 충전하면 50km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시속 6km로 이동하면 8시간가량 쓸 수 있다.
권 매니저는 “자율주행 휠체어는 일본 등에서도 개발했으나 가격이 찻값 수준으로 비싸 많이 보급되지 못했다”며 “우리의 목표는 최대한 저렴한 제품을 생산해 시장의 저변을 넓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동 휠체어를 개조하는 방식으로 가격을 낮추고 대중화를 노리겠다는 전략이다.
현재 시중에서 팔리는 전동 휠체어 가격은 200만원 안팎이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안전 기능을 적용한 독일 ‘오토복’ 등 고가 휠체어는 500만원이 넘는다. 여기에 자율주행 기능을 추가하면 금액이 훌쩍 올라갈 수밖에 없다. 제로원 팀은 올해 수동 휠체어를 개선한 경량형 전동 휠체어를 우선 양산하고, 저렴한 자율주행 휠체어도 수년 내로 상용화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앞으로 해결할 과제가 많다. 제조원가를 낮추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사용 장소를 확대하는 것이다. 자율주행이 가능해지려면 일반 도로뿐 아니라 휠체어가 다니는 수많은 건물의 전자 지도가 필요하다.
사회가 자율주행 휠체어를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휠체어에 자율주행 기술을 접목해도 건물에 턱이 많거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면 쓸모가 없다. 국내에서 전동 휠체어는 법규상 다닐 수 없는 차도는 물론 인도에서도 배려받지 못하는 불편한 이동 수단이다.
“요즘 자동차 운전자들이 앰뷸런스를 보면 비켜주는 문화가 정착됐잖아요. 자율주행 휠체어도 보급이 확대하면 사회적 인식과 규범도 함께 변화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이테크(최첨단 과학 기술)나 유행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향한다는 게 마음에 들어요. 가까운 시일 내에 이동 약자분들께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길 바랍니다.” 기계를 다루는 정보기술(IT)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지만 말에 온기가 있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송영욱 튠잇 대표(왼쪽부터), 권영진 현대차그룹 제로원 책임매니저, 박동현 하이코어 대표가 자율주행 휠체어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현대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