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김영우 에스케이증권 리서치센터장, 크리스 밀러 터프츠대 교수, 오타 야스히로 <닛케이> 칼럼니스트
미국이 중국 반도체산업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고, 자국 중심의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도 늘리면서 반도체산업이 큰 변곡점을 맞았다. <반도체 투자 전쟁>을 펴낸 김영우 에스케이(SK)증권 리서치센터장과 <반도체 전쟁>(Chip War)을 쓴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교수,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반도체 지정학>의 저자 오타 야스히로 <닛케이> 칼럼니스트 등 한·미·일 반도체산업 전문가들은 반도체산업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최근 변화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선 이견을 보였다. 전자우편과 전화통화 등으로 개별 진행한 인터뷰를 재구성했다.
—바이든 정부의 중국 반도체 제재의 의미는?
크리스 밀러 터프츠대 교수(이하 밀러) 지난 11월 초에는 기존 14나노(nm·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 생산 장비의 중국 수출을 제한한 데 이어 그래픽처리장치(GPU) 칩 관련 제조장비 수출도 막았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 대중 무역적자 우려와는 전혀 다르다. 군사, 정보 또는 사이버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공지능(AI) 분야에서 중국의 발전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첨단 칩은 군사용과 민간용으로 모두 사용되기 때문에, 미국의 수출 제한은 중국 인공지능 기술 개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김영우 에스케이증권 리서치센터장(이하 김영우) 중국은 과거 미국의 경쟁자였던 소련과 다르다. 커다란 내수시장과 생산 능력을 갖고 있다. 이미 이동통신 산업에서 5세대(G) 기술은 미국을 능가했다.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려면 이동통신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하며, 첨단 반도체 시장으로의 진입을 원천 봉쇄해야 하며, 우주 산업 경쟁에서도 승리해야 한다. 그 핵심이 바로 반도체 산업 발전을 지체시키는 것이다.
—반도체가 안보의 필수품이 됐다.
오타 야스히로 닛케이 칼럼니스트(이하 오타) 반도체는 처음부터 국가안보 전략 상품이었다. 미국이 과거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견제할 때, 미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을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안보적 측면에서도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미·일 반도체 협정의 주된 동기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사태와 미·중 간 대립이 심화되면서 안보가 무역보다 중요해졌다. 좋든 싫든 기업은 이제 국제정치에 민감해야 한다. 정부도 반도체산업을 지원하면서 안보 전략도 정책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중국에 얼마나 영향이 있을까?
김영우 미국의 제재 효과는 얼마나 지속되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이 가장 뒤처진 부분은 완성품인 디(D)램이나 낸드플래시가 아니라 제조장비(equipment)다.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한 주요 장비와 그 핵심 부품을 스스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 내에서 반도체를 자급할 수 있더라도, 글로벌 시장에서는 첨단 반도체 공급이 어려워지는 갈라파고스 신세가 될 수 있다.
오타 특정 영역에서 상당히 효과가 있을 것이다. 중국은 10나노 이하 초미세 가공에 대해 미국과 그 우방국으로부터 대부분의 재료, 제조장비, 설계자산(IP)을 의존했는데, 이를 조달할 수 없게 됐으니 첨단기술 개발이 지연될 것이다. 일본에선 중국과 한국·대만의 기술격차가 3~4년이라고 봤는데, 이번 제재로 10년으로 더 벌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다만, 레거시(보급형) 반도체 분야에서는 미·중 교역이 오히려 증가해, 이 분야에선 상호 의존하는 모습이다.
—미국의 제재와 생산시설 유치 노력이 한국 기업에게 미칠 영향은?
밀러 미국은 중국 정부 보조금을 많이 받는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등의 성장을 늦추는 게 목적이다. 과거엔 중국 반도체 기업이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 등의 점유율을 빼앗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당분간은 중국 업체들이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워져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에 긍정적일 수 있다. 또 한국 회사가 미국에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지만, 한국 내 생산시설과 향후 투자 계획보다는 적어 한국 내 반도체 산업에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영우 미국의 ‘반도체와 과학법’(Chips & Science Act)에 따른 영향이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이 법은 첨단 제조업과 공급망을 자국 안에 확보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결국 파운드리뿐만 아니라 메모리 반도체와 서플라이 체인의 투자 확대를 이끌어 내고자 할 것이다. 결국 우리 기업들도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릴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생산지 기준으로 한국의 점유율은 중장기적으로 하락이 불가피하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반도체 소재 수출 제한을 했다.
오타 2019년 7월 일본 기업들은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에 대해 한국 수출 제한 조처를 받았다. 당시 한·일 정부간 정치적 이견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경제정책을 쓰는 것은 자유무역 관점에서 잘못됐다. 일본의 제한 조처로 한국 기업은 자재를 조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 기업들도 중요한 고객을 잃어 일본 정부에 좌절감을 느꼈다. 상호 발전과 안정적 공급망 유지를 위해 한·일 신뢰관계가 깨져서는 안된다.
—한국 기업은 미·중 갈등 등 급변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밀러 수십 년 동안 한국은 첨단 기술 개발과 경쟁력 있는 가격을 이용해 성공을 거둬왔다. 이는 앞으로도 성공의 지배적인 원인이 될 것이다. 결국 지속적으로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것만이 답이다.
오타 티에스엠시 설립자 모리스 창은 미국은 생산시설을 갖추기에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창립 시절 인텔 등 다른 미국 기업들이 투자 요청을 거절한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핵심 생산시설은 대만에 유지하려는 전략은 옳다.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 한국 기업들도 중국보다 미국과 관계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미국에 모든 것을 내주기보다 최선의 무기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자유무역의 시대는 끝나고, 경제 안보의 시대가 열렸다.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은 일본 업체보다 더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다. 극단적인 경우,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날 수 있어, 현명한 균형을 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 정부의 역할은?
오타 소니는 자사 생산시설이 있는 구마모토 근처에 티에스엠시 공장을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티에스엠시는 이미지센서의 가장 큰 고객의 요청에도 수익성, 효율성 등을 이유로 결정을 주저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노력으로 유치하게 됐다. 정부가 국외 기업 유치와 생산 시설 확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매우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미·중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찾는 동시에, 반도체 외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반도체뿐만 아니라 차세대 기술에 대한 투자가 필수적이다.
김영우 한국은 중국 반도체 산업의 최대 투자국이다. 또 에스케이하이닉스가 인텔의 낸드사업 부문을 인수하면서, 미국 기업들은 중국에 주요 생산시설이 없게 됐다. 미국이 중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한테 상당히 거친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결국 정부는 ‘팹(FAB)4’,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등을 잘 활용해 중국에서 한국 메모리 반도체 팹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돕고,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특허 침해 등을 할 수 없도록 미국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을 매력적인 반도체 생산기지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글로벌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을 유치해 생산과 연구개발(R&D)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 기업들이 미국 진출 시 현지 기업과 동등한 수준 이상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견제하고 조율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지정학적 위기 고조와 국내 인구 감소,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재생에너지 비중 상향 등을 고려한 장기 플랜이 마련돼야 할 시점이다. 당장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다. 이같은 글로벌 흐름에 대응하는 긴 안목의 대책이 필요하다.
—차세대 기술 경쟁력 발전과 강화도 중요할텐데.
김영우 향후 우주개발이나 빅데이터 기반의 메타버스 환경에서 양자컴퓨팅은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하지만 전문인력이 미국이나 중국 대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박사급 전문인력 기준으로 한국은 150명 정도인데, 미국은 1200명, 중국은 2천명에 이른다. 정책적으로 인력 양성을 지원한다지만, 한국 인력만으로 부족할 수 있어 해외 우수 인재를 모셔오고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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