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삼성 비자금 사건’ 10년, 전종훈 전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삼성 비자금 사건’ 10년, 전종훈 전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0년 전 ‘삼성 문제’를 용기있게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1998년에서 2004년까지 7년 동안 삼성그룹의 고위 임원으로 있었던 김용철 변호사와 그의 양심 고백을 받아 여러차례 기자회견을 주도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교회 안팎의 핍박과 방해를 뚫고 삼성과의 싸움에 나선 까닭은 삼성이 거듭나고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경제민주화가 뿌리내리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를 세워야 할 검찰(특검)과 법원은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불법 비자금을 만들었던 삼성 총수 일가는 도리어 숨겨둔 돈 4조5천억원을 합법적으로 ‘획득’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불법 경영승계의 꼬리표마저 말끔히 털어냈다. 그때부터라도 삼성이 진정으로 변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박근혜 정부 시절 삼성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괴이한’ 합병을 밀어붙였고, 이 과정에서 권력과 결탁해 국민연금까지 동원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몰락과 함께, 삼성의 80년 가까운 역사에서 최초로 그룹 총수가 구속됐다. 2007년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로 삼성 비자금 폭로를 주도했던 전종훈 신부가 지난 1일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수양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르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도 벌 받는 것은 법의 형평과 평등성이자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죗값을 안 치르는 사회라면 희망이 없는 것 아니냐.” 10년 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때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로서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섰던 전종훈 신부는 “이번 사건의 처리가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도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사제단이 받아 10년 전 제기
“당시 억지 면죄부 받았으나
이재용 결국 구속…사필귀정”
“5년형 선고가 봐주기 아니길
합당한 죗값 치러야 민주주의”
“삼성 처리는 경제민주화와
문재인 정부 성공의 시금석”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월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뇌물 공여 등 혐의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뒤 서울구치소로 이동할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삼성 비자금 실태가 드러난 뒤 사회적 압력이 거세지자, 삼성은 이건희 회장 퇴진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건희 회장이 2008년 4월22일 퇴진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 하지만 이 회장은 경영위기 등의 명분을 내세워 2010년 3월24일 전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전 신부에 3년간 ‘강제 안식’
“권력·돈과 결탁한 교회가
세상 아픔을 안을 수 있나”
“침묵한 교회와 성직자가
이명박·박근혜 연장의 주범”
“종교는 비판의 성역 아냐
교회도 이제 제자리 찾아야”
‘네가 교회 주인이냐’며 안식년 강제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이 2007년 11월12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성당에서 연 ‘삼성과 검찰의 회개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전종훈 신부(가운데)가 뇌물검사 3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른바 ‘안기부 엑스(X)파일’과 관련해 2005년 8월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항의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삼성의 불법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진상규명과 특검 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김용철 변호사(오른쪽 둘째)가 2007년 11월5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이들 중엔 검찰 최고위 간부도 여럿 있다고 폭로하고 있다. 왼쪽 둘째는 전종훈 신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전종훈 신부가 경남 하동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휴양원 앞에서 <한겨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교회가) 선택할 때는 가장 가난한 것을 먼저 택해야 하는데 그러한 공동선을 교회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가진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며 “교회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용철 “삼성이 하나도 안 바뀌고 변화할 기미도 없는데…”
“할 얘기 없다”며 인터뷰 끝내 사양
“삼성 말고 지금 일에 최선 쏟고파”
7년째 광주교육청 감사담당관 맡아
“광주 교육계 깨끗해졌다” 평 듣기도
“삼성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바뀌고, 변화할 기미도 전혀 없는데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삼성과 관련해서는 내 역할은 10년 전에 끝났다.” 10년 전 양심고백을 통해 ‘삼성 비자금’의 실체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용철(59) 전 삼성 법무팀장(현 광주교육청 감사담당관, 이하 호칭 생략)은 전화 통화에서 “삼성과 관련해서는 할 얘기가 더 없다”며 찾아오지도 말라고 말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앉으면 혹시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안고 지난달 28일 광주로 무작정 찾아갔으나,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김용철은 2010년 12월 광주교육청의 개방형 감사담당관에 공개 경쟁을 통해 채용됐다. 그는 “교육감(장희국)과 아무런 인연이나 안면이 없었다. 직업 없이 놀고 있을 때 광주에 있는 친구들이 개방형 감사담당관 자리에 응모해보라고 권했다. 고향에 가서 일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 싶어 내려왔다”며, 짧게 근황을 설명했다. 전설적인 특수부 검사였던 그가 감사 책임자가 된 뒤 광주 교육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게 주변의 평이다. 그는 학교 건축이나 각종 공사와 관련한 입찰 비리, 촌지 수수 등의 낡은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 맡은 일마다 일벌백계로 다뤘다. 광주교육청의 한 출입기자는 8일 “김 감사담당관이 취임 직후부터 엄한 잣대를 들이대자 초기에는 일선의 반발도 있었지만, 차츰 적응해 지금은 광주의 교육계만큼은 아주 투명하고 깨끗해졌다. 무엇보다 학부모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광주일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김용철은 1989년 인천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해 부산지검과 서울지검에서 줄곧 특수부 검사로 일했다. 검사는 정의감 강한 그에게 딱 맞았다. 음주 사고를 내고 도망간 친동생과 만취 상태에서 사람을 폭행한 처남을 구속하도록 한 일은 법조계에서 유명하다. 그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친가와 처가 형제들과 의절해야 했다. 김용철은 1995년에 시작된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 때 검찰의 전설을 하나 만들었다. 1996년 전두환 비자금을 파던 중 김석원(쌍용그룹 회장) 자택에 숨겨져 있던 전두환의 돈 61억원을 찾아냈다. 부담을 느낀 정권과 검찰 고위간부들이 수사 중단을 요구했지만, 그는 김석원 자택을 뒤져 사과상자에 담긴 현금을 압수했다. 이 일로 부천지청으로 좌천성 인사 발령을 받자, 그는 검찰 조직에 환멸을 느끼고 옷을 벗었다. “기업에 들어가서 법조인 역할이 아닌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 합리적 경영기법을 갖춘 일류 기업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삼성을 생각한다> 121쪽) 그는 변호사 말고 인사팀에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1997년 8월 삼성에 입사했지만, 삼성은 그를 처음부터 법무실에 배치했다. “그때부터 검찰 선후배나 동기들에게 뇌물성 현금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종종 받았다. 나는 이런 지시를 때로 이행했고, 때로 거부했다.”(<삼성을 생각한다> 125쪽) 삼성 조직과 불화하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2004년 7월 스스로 삼성 임원(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그만둔 최초의 사람이 됐다. 삼성은 김용철이 2007년 5월 <한겨레>에 쓴 칼럼 등을 이유로 법무법인 ‘서정’에 압력을 넣어 변호사 김용철을 내쫓도록 압박했다. 김용철이 2007년 10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찾아가 삼성 비자금과 자신이 삼성에서 저질렀던 불법 행위들을 양심고백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파장은 엄청났다. 삼성 비자금 특검(조준웅)이 구성돼, 삼성이 숨겨놓은 돈 4조5천억원을 찾아냈다. 그러나 특검은 이 돈을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의 차명재산이라며 삼성에 돌려주고, 이건희는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데 그쳤다. 조준웅의 아들은 이후 특채로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건희는 2009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아, 오랫동안 따라다니던 불법 경영권 세습 꼬리표를 거의 ‘말끔히’ 털어냈다. 넉달 뒤 대통령 이명박은 이건희 1인에 대해 특별사면했다. 역사의 중심에 선 개인은 그것이 비록 영광스럽더라도 힘들다. 김용철 역시 양심고백 이후 “정의의 사도”라는 찬사와 박수 못지않게 “배신자”라는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삼성은 나에게는 과거다. 지금은 현재의 내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 봤듯이 우리 사회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느냐.” 그가 던진 짧은 이야기다. 김용철의 미래를 조용히 지켜보는 게 그에게 빚진 사람들의 몫이리라는 생각에 그와 기쁘게 헤어졌다.
김용철 변호사가 27일 오후 서울 한남동 이건희 삼성 회장 일가의 비자금 조성 등을 수사하는 조준웅 특별검사팀에서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을 모시고 온 기사라며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편 사제단 신부들은 피의자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것 등에 항의 면담을 거절했다. 왼쪽은 김영식 신부.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삼성 말고 지금 일에 최선 쏟고파”
7년째 광주교육청 감사담당관 맡아
“광주 교육계 깨끗해졌다” 평 듣기도
“삼성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바뀌고, 변화할 기미도 전혀 없는데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삼성과 관련해서는 내 역할은 10년 전에 끝났다.” 10년 전 양심고백을 통해 ‘삼성 비자금’의 실체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용철(59) 전 삼성 법무팀장(현 광주교육청 감사담당관, 이하 호칭 생략)은 전화 통화에서 “삼성과 관련해서는 할 얘기가 더 없다”며 찾아오지도 말라고 말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앉으면 혹시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안고 지난달 28일 광주로 무작정 찾아갔으나,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김용철은 2010년 12월 광주교육청의 개방형 감사담당관에 공개 경쟁을 통해 채용됐다. 그는 “교육감(장희국)과 아무런 인연이나 안면이 없었다. 직업 없이 놀고 있을 때 광주에 있는 친구들이 개방형 감사담당관 자리에 응모해보라고 권했다. 고향에 가서 일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 싶어 내려왔다”며, 짧게 근황을 설명했다. 전설적인 특수부 검사였던 그가 감사 책임자가 된 뒤 광주 교육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게 주변의 평이다. 그는 학교 건축이나 각종 공사와 관련한 입찰 비리, 촌지 수수 등의 낡은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 맡은 일마다 일벌백계로 다뤘다. 광주교육청의 한 출입기자는 8일 “김 감사담당관이 취임 직후부터 엄한 잣대를 들이대자 초기에는 일선의 반발도 있었지만, 차츰 적응해 지금은 광주의 교육계만큼은 아주 투명하고 깨끗해졌다. 무엇보다 학부모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광주일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김용철은 1989년 인천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해 부산지검과 서울지검에서 줄곧 특수부 검사로 일했다. 검사는 정의감 강한 그에게 딱 맞았다. 음주 사고를 내고 도망간 친동생과 만취 상태에서 사람을 폭행한 처남을 구속하도록 한 일은 법조계에서 유명하다. 그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친가와 처가 형제들과 의절해야 했다. 김용철은 1995년에 시작된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 때 검찰의 전설을 하나 만들었다. 1996년 전두환 비자금을 파던 중 김석원(쌍용그룹 회장) 자택에 숨겨져 있던 전두환의 돈 61억원을 찾아냈다. 부담을 느낀 정권과 검찰 고위간부들이 수사 중단을 요구했지만, 그는 김석원 자택을 뒤져 사과상자에 담긴 현금을 압수했다. 이 일로 부천지청으로 좌천성 인사 발령을 받자, 그는 검찰 조직에 환멸을 느끼고 옷을 벗었다. “기업에 들어가서 법조인 역할이 아닌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 합리적 경영기법을 갖춘 일류 기업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삼성을 생각한다> 121쪽) 그는 변호사 말고 인사팀에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1997년 8월 삼성에 입사했지만, 삼성은 그를 처음부터 법무실에 배치했다. “그때부터 검찰 선후배나 동기들에게 뇌물성 현금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종종 받았다. 나는 이런 지시를 때로 이행했고, 때로 거부했다.”(<삼성을 생각한다> 125쪽) 삼성 조직과 불화하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2004년 7월 스스로 삼성 임원(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그만둔 최초의 사람이 됐다. 삼성은 김용철이 2007년 5월 <한겨레>에 쓴 칼럼 등을 이유로 법무법인 ‘서정’에 압력을 넣어 변호사 김용철을 내쫓도록 압박했다. 김용철이 2007년 10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찾아가 삼성 비자금과 자신이 삼성에서 저질렀던 불법 행위들을 양심고백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파장은 엄청났다. 삼성 비자금 특검(조준웅)이 구성돼, 삼성이 숨겨놓은 돈 4조5천억원을 찾아냈다. 그러나 특검은 이 돈을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의 차명재산이라며 삼성에 돌려주고, 이건희는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데 그쳤다. 조준웅의 아들은 이후 특채로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건희는 2009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아, 오랫동안 따라다니던 불법 경영권 세습 꼬리표를 거의 ‘말끔히’ 털어냈다. 넉달 뒤 대통령 이명박은 이건희 1인에 대해 특별사면했다. 역사의 중심에 선 개인은 그것이 비록 영광스럽더라도 힘들다. 김용철 역시 양심고백 이후 “정의의 사도”라는 찬사와 박수 못지않게 “배신자”라는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삼성은 나에게는 과거다. 지금은 현재의 내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 봤듯이 우리 사회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느냐.” 그가 던진 짧은 이야기다. 김용철의 미래를 조용히 지켜보는 게 그에게 빚진 사람들의 몫이리라는 생각에 그와 기쁘게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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