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티에스엠시(TSMC)가 미국 현지에 대규모 공장을 짓는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해온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과 코로나19에 따른 반도체 공급망 충격에 따른 것이다. 비메모리반도체 분야에 집중 투자해 2030년까지 세계 1위 업체로 거듭나겠다고 한 삼성전자의 향후 행보도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세계 비메모리반도체 시장에 격변이 일고 있다.
대만 소재의 반도체 기업 티에스엠시는 15일
보도자료를 내어 미국 서부에 위치한 애리조나주에 회로선 폭이 5㎚(1nm = 1억분의 1m)인 반도체칩을 만들 수 있는 최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다고 밝혔다. 오는 2021년부터 착공에 들어가며 총투자금액은 120억달러(우리돈 약 14조원)이다. 회사 쪽은 “새로 생겨나는 직접 일자리가 1600개”라고 밝혔다.
티에스엠시의 미국 현지 공장 건설은 미 정부의 강한 압박에 따른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앞세우며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줄곧 미국 기업과 거래하는 국외 기업들의 미국 내 생산을 직간접적으로 요구해왔으며, 중국과의 외교·경제 갈등이 첨예해짐에 따라 압박 강도를 높여왔다. 특히 올해 들어선 미국 기업이 생산한 장비를 활용하는 국외 기업이 중국 기업과 거래할 때는 미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규제 방안을 추진해왔다. 시장에선 중국 대표 정보기술(IT)기업인 화웨이를 핵심 고객사로 둔 티에스엠시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 티에스엠시는 이날 미국 현지 공장 신설 방침을 밝힌 보도자료에서 “(미국 현지 공장 신설은) 미국의 주요 기업들이 미국 내에서 생산된 반도체로 첨단 제품을 만들려는 미국 반도체 생태계 내에서 전략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티에스엠시의 발표 직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환영 의사를 밝히며 “중국이 첨단 기술 산업을 지배하려는 이 시기에 이번 거래는 미국의 국가 안보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중 경제 갈등과 국외 주요 기업의 현지 생산 구축을 경제 문제를 넘어 국가 안보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티에스엠시의 이번 결정은 세계 1위 비메모리반도체 기업을 목표로 투자를 늘려가고 있는 삼성전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압도적 1위에 올라섰지만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비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선 부진한 편이다. 실제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가 발표한 올 1분기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을 보면, 티에스엠시가 54.1%로 1위이며, 삼성전자는 그 뒤를 잇고 있으나 점유율이 15.9%에 머물고 있다. 추격자와 선도자 간의 차이가 큰 셈이다.
이에 지난해 4월 삼성은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 세계 1위를 목표로 연구개발(R&D) 및 설비확충에 모두 133조원을 투자하는 것을 뼈대로 한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한 바 있다. 삼성전자는 애플과 인텔 등 미국 주요 기업에 비메모리반도체를 공급하고 있지만, 티에스엠시의 미 현지 공장 증설과 자국 생산을 강조하는 미 정부의 방침 탓에 기존 물량을 뺏기거나 신규 물량을 받지 못할 공산이 높아졌다. 삼성전자로선 미국 내 생산 기지인 텍사스 주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의 생산 시설 확충 속도를 높이거나 다른 지역 신규 공장을 건설해야하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아직까지 삼성전자는 이런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 방안은 밝히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쪽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경쟁 사업자의 움직임과 관련해선 공개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만 밝혔다. 업계에선 문재인 정부가 국내 투자와 고용 확대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인 터라 미 현지 생산 시설 확충에 삼성전자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