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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산업·재계

대기업 돈 풀어 벤처 키운다지만…‘문어발 확장’ 우려 커

등록 2020-06-12 05:00수정 2020-06-12 10:39

지주사에 벤처캐피탈 허용 왜
미래 먹거리 찾으려는 대기업
벤처 혁신사업 블루오션 주목
민주당도 ‘생산적 투자’ 적극적

금산분리 원칙 흔드는 정부
인터넷전문은행 특별법 제정 등
대기업 규제 칸막이 계속 없애
재벌 경제력 확대 불쏘시개 우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도입에 속도가 붙은 데는 벤처 생태계 활성화를 바라는 벤처 업계의 꾸준한 요구와 신성장 동력 발굴에 목마른 재계, 대기업의 풍부한 자금을 혁신경제 쪽으로 끌어와 경제 역동성을 높이려는 정부·정치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충격도 기업형 벤처캐피탈 도입론이 탄력을 받은 배경이다. 하지만 20여년간 재벌 규제의 대전제이던 금산분리 원칙을 일부 허무는 것이라 논란이 예상된다.

■ ‘모험자본’ 부족한 벤처시장
기업형 벤처캐피탈 도입은 벤처 업계의 오랜 바람이었다. 원인으론 공공 중심의 벤처자금 생태계의 한계가 맨 먼저 꼽힌다. 중소벤처기업부 자료를 보면, 전체 벤처 투자금의 30% 남짓이 세금을 종잣돈으로 한 공공자금이다. 자금시장 규모를 불리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모험자본’ 부족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정부 감사를 받아야 하는 공공자금은 공격적인 투자가 어려워서다. 좁디좁은 ‘회수시장’도 벤처 업계가 기업형 벤처캐피탈 도입을 바라는 배경이다. 통상 벤처기업은 창업 초기 4~5년 동안 적자를 낸 후 기업가치를 끌어올려 다른 기업에 인수되거나 증시에 상장하는 방식으로 투자금과 수익을 회수한다.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은 규모가 작은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업공개(IPO) 외에 달리 회수 방안을 찾기 어렵다. 유효상 숭실대 교수(경영학)는 “국내 유니콘(기업가치가 1조 이상인 벤처기업)이 국외에 팔려가는 이유는 국내에 (유니콘을) 담을 그릇이 없기 때문”이라며 “대기업과 같은 큰손이 기업형 벤처캐피탈을 통해 벤처시장에 뛰어들게 되면 판도에 큰 변화가 일 것”이라고 말했다.

■ 새 먹거리에 목마른 젊은 총수들
“어느 기업도 10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 지난해 6월14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장단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한 말이다. 고도 성장기에 그룹을 이끈 이전 세대와 달리 40·50대 총수들은 급변하는 산업·기술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크다. 하지만 새 ‘먹거리’ 찾기 성과는 지지부진한 상황을 못 벗어나고 있다. 주요 그룹 중 최근 10년새 사업 포트폴리오를 큰 폭으로 바꾸거나 새 탈출구를 찾은 곳은 드물다. 반면 네이버(4위)와 셀트리온(6위), 카카오(10위) 등 새 주자들이 재벌 계열사를 하나둘 밀어내며 시가총액 10위권에 들어섰다.

젊은 총수들이 국외에서 벤처 투자에 나서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한 예로 구광모 엘지(LG) 회장은 2018년 6월 취임 직후 미국 실리콘밸리에 ‘엘지테크놀로지벤처스’란 이름의 기업형 벤처캐피탈을 설립했다. 지난 3월까지 투자액은 17개 업체 4300만달러(약 516억원)다. 현대자동차도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사실상 그룹을 이끌기 시작한 지난해부터 국외 벤처 투자에 적극 뛰어들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만 현대차 한 곳의 국외 벤처 투자액은 500억원 수준이다. 첨단기술 기업은 물론 벤처캐피탈에도 투자한다.

■ 경제 활성화 원하는 정부
기업형 벤처캐피탈 도입은 사실 현 정권 출범 직후부터 물밑에서 논의돼왔다. 논의를 주도한 건 정부보다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쪽이었다. 재벌 대기업 곳간에 잠겨 있는 자금을 생산적인 분야로 끌어와야 한다는 구상 아래 기업형 벤처캐피탈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11일 국회에서 열린 기업형 벤처캐피탈 도입 토론회에 잠재적 대선 후보로 꼽히는 이낙연 의원과 김태년 원내대표, 5선인 김진표 의원 등 중진 의원이 대거 참석한 것도 여당 내 인식을 가늠케 한다.

■ ‘금산분리 원칙’ 훼손 불가피
기업형 벤처캐피탈 도입에 대한 일부의 우려는 이 방안이 재벌그룹의 경제력 확대에 불쏘시개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기 자본이 아닌 계열사·개인·자산운용사 등 외부 자금을 끌어와 신규 사업에 마음껏 뛰어들 수 있어서다. 삼성·현대차 등도 지주회사가 아니라서 현 제도 아래서도 별다른 제약은 없지만, 문어발 확장이란 사회의 부정적 시선 탓에 국내 벤처 투자에 소극적이던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산업(혹은 금융)자본의 금융(혹은 산업)자본 지배를 막기 위한 금산분리 원칙이 훼손되는 것도 도입 반대론의 핵심 근거다. 금산분리는 통상 재벌 대기업을 규율하는 핵심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진보 성향의 현 정부에서 금산분리 원칙이 꾸준히 허물어져왔다는 점은 흥미롭다. 2018년 10월 인터넷전문은행 특별법 제정(인터넷은행에 한해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 허용)이나 같은 해 9월 은행 등 금융회사가 핀테크기업에 한해 일반기업에 출자를 허용하는 ‘금융회사의 핀테크기업 투자 가이드라인’ 도입이 그 예다. 모두 정보통신기술(ICT)과 금융업이 융복합하는 산업 환경 변화를 반영한 제도 개혁이라는 명분을 현 정부는 내건다. 과거엔 보수 세력이 시도하고 진보 세력은 반대하던 일이다.

송채경화 최민영 김윤주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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