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필 지에프아이(GFI) 마케팅 대표가 지난 3일 경기 김포 사업장 회의실에서 가스점화기로 패드형 미세캡슐 소화기에 불을 붙여보고 있다. 소화기가 작동하면서 불이 바로 꺼졌다. 이노비즈협회 제공
지난해 6월 경기도 이천 쿠팡 물류센터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의 발단은 멀티탭이었다. 지하 2층 물품 진열대 위쪽에 설치된 선풍기 연결용 멀티탭에서 불이 붙기 시작하는 모습이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멀티탭에서 튄 불꽃은 지상 4층, 지하 2층 연면적 12만7178㎡ 건물을 몽땅 태우는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국내 중소기업 지에프아이(GFI)의 초소형 미세캡슐 소화기는 멀티탭이나 분전함(두꺼비집), 에너지저장장치(ESS) 따위에서 발생하는 화재를 초기 단계에 진압하도록 고안된 장치다. 지에프아이는 2014년 설립 뒤 4~5년에 걸친 연구·개발(R&D) 과정을 거쳐 소화 약제를 함유한 마이크로캡슐을 국산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첫 마이크로캡슐 소화기 개발업체’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 회사의 핵심 기술은 소화 약제를 지름 100㎛(0.1㎜) 크기의 캡슐에 담는 일이다.
소화 약제를 함유한 지에프아이(GFI)의 미세캡슐을 확대한 모습. 실제 크기는 지름 0.1㎜ 수준이다. 지에프아이 제공
기술혁신형 중소기업 모임인 이노비즈협회 주선으로 경기도 김포에 있는 지에프아이 사업장을 방문한 지난 3일 오후, 제1공장에서 미세캡슐 제조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현장을 안내한 최영호 공장장은 “쓰리엠(3M)에서 들여오는 소화 약제 ‘노벡(Novec) 1230’을 기초 원료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노벡 1230은 할론 및 수소불화탄소(HFC)의 대체재로 개발된 친환경 물질이며, 액체에서 기체로 바뀌는 과정에서 열을 빠르게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불을 끄는 성질을 띠고 있다고 한다. 방문 당시 1공장 입구 한켠에 노벡 1230을 담은 300㎏짜리 드럼통이 잔뜩 쌓여 있었다.
미세캡슐을 만드는 과정은 자동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원료 투입만 사람 손으로 할 뿐, 기초 원료에 다른 재료를 섞어 캡슐을 만들고, 숙성시켜 수분을 제거하고 건조하는 공정 등은 모두 자동화 기계에 맡겨져 있다. 커다란 강관과 컨베이어벨트를 거쳐 최종적으로 생산된 캡슐은 연한 주황빛을 띤 가루 상태였다.
최 공장장은 “원료 투입부터 최종 생산까지 대략 20시간 가량 걸린다”고 말했다. 기초 원료에 섞는 추가 재료나 구체적인 공정에 대해선 “대외비”라며 자세한 설명을 꺼렸다. 이 마이크로캡슐에 불이 닿아 온도가 일정 수준(120~200°C)에 이르면 캡슐이 순식간에 터지면서 소화 약제를 방출해 초기에 불길을 잡는다. 주황색 공 모양의 초미세 알갱이가 소화 약제를 가득 머금은 ‘특급 소방수’인 셈이다.
경기도 김포에 있는 지에프아이(GFI) 제1공장 내부 모습. 이곳에서 기초 원료인 소화 약제를 함유한 미세캡슐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노비즈협회
김운선 지에프아이 상무는 “(분말 형태의) 캡슐이 처음에는 연한 색깔인데, 공기 중에 노출되면서 점차 진한 색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연간 500t가량 생산되는 가루 상태의 캡슐에 에폭시·실리콘 같은 ‘바인딩’(결합) 물질을 혼합해 일정한 틀에 넣고 응고 과정을 거쳐 최종 소방용품을 만들어내게 된다. 사용처에 따라 용품의 형태는 다양하다. 멀티탭 내부에 장착할 수 있는 패드형, 전기선·통신선에 감아 쓸 수 있는 테이프형, 전선 다발을 덮어씌우는 커버형, 분·배전함에 설치할 수 있는 와이어(전선)형도 있다. 방문 당시 회사 실험실에서 이뤄진 패드형 소화기의 실제 작동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윤성필 마케팅 대표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 작동하는 능동적 소방 제품”이라며 “소화 약제 저장을 위한 축압용기나 분사장치, 감지기 같은 별도 장치가 필요없어 오작동 가능성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분전함 설치용 3㎝x19㎝ 크기의 패드형 가격은 개당 2만원 수준이라 했다. 지에프아이는 반제품 상태의 멀티탭을 들여와 마이크로캡슐을 장착한 제품을 김포 2공장에서 직접 생산하고도 있다. 이는 온라인몰을 통해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판매하고 있다. 4구짜리 가격이 2만500원 수준으로, 일반 멀티탭보다 20~30%가량 비싸다.
지에프아이는 ‘소화용 마이크로캡슐, 이의 제조방법 및 이를 포함하는 소화장치’(제10-2123554호) 등 캡슐 관련 특허 3건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제품 특허 9건, 응용 특허 5건을 아울러 확보하고 있을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행정안전부 방재 신기술(NET) 같은 다양한 인증을 받고,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 주최 중소기업기술혁신대전 기술혁신 부문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에프아이(GFI)의 패드형 미세캡슐 소화기(왼쪽 주황색 부분)를 부착한 멀티탭. 누전에 따른 화재의 확산을 막았던 실물 제품이다. 이노비즈협회 제공
지에프아이의 지난해 매출은 206억원으로 집계돼 있다. 임직원 33명이 거둔 실적이다. 현재 매출의 대부분은 국내 배터리 3사 중 한 곳(업체명 비공개)에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 배터리 업체는 전기차용 배터리에 지에프아이 소방용품을 탑재해 화재 사고에 대비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대형 플랫폼 기업 데이터센터와 함께 지에프아이의 사업 영역 확장을 위한 주요 관심 영역이다. 지에프아이는 전통시장 상가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다. 멀티탭이나 배·분전함이 낡은 데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전기 화재 위험성을 늘 안고 있는 취약 지대라는 점에서다. 윤성필 대표는 “내년 한 해 동안 전국 전통시장 1600곳을 모두 돌면서 화재 위험과 방지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알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에프아이의 소화 용품 브랜드 이름은 ‘이지스’이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가 딸 아테나에게 줬다고 하는 이지스 방패처럼 화재 사고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김포/김영배 선임기자
kimy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