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돈으로 따지면 3천억원 번 조준호
일제 치하의 국내 증권시장에서 ‘주식왕’은 조선인이었다.
9일 한국증권업협회가 창립 55주년을 맞아 발간한 <이야기로 보는 한국 자본시장>을 보면, 광복 이틀 전인 1945년 8월13일까지 운영된 ‘조선취인소’에서는 조선인 조준호가 가장 큰 부를 쌓았다.
그는 대한제국 말 갑부 조중정의 큰아들로 태어나, 도쿄 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1926년 <시대일보>에 사재를 투자해 경영에 참여했으나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문을 닫았다. 이후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34년 동아증권을 설립하고 명동에 점포를 내면서 증권업계로 사업범위를 넓혔다.
우리나라 최초의 증권거래소 형태인 조선취인소는 1932년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과 인천미두취인소를 합병한 일본인이 세웠다. 당시 경성(서울) 명동에 본점을 두고 유가증권시장을 열고, 인천에 지점을 두고 미두시장을 개설했다. 정보력이나 자금력이 월등한 일본거래상에 휘둘려 쪽박을 차는 조선인들이 부지기수였으나 조준호는 달랐다. 동아증권은 각지에 연락망을 갖추고 도쿄와 오사카 주식시장 시세를 빨리 전달한 덕분에 설립 첫해부터 명동 제일의 중매점으로 명성을 날렸다. 광복 직전까지 전체 매매고의 10% 이상이 동아증권을 통해 이뤄지게 됐다.
직접 투자에도 나서, 주식이 폭락해 투매가 벌어지는 와중에 쏟아지는 매물을 거둬들였다가 급등장에서 엄청난 차익을 얻었다. 이로 인해 조선취인소에서 300만원(현재 3천억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당시 논 6만 마지기, 1200만평을 사들일 수 있는 돈이었다. 명동 증시는 광복 이틀 전 일본 패망을 알고 폐장했다. 조준호는 광복 후 주식시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밑천으로 사업을 키워 사보이호텔(서울 충무로 1가)을 설립했다.
황상철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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