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연설을 듣던 미국 상·하원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424 대 8.
미국 하원이 지난 17일 러시아와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 단절을 규정한 법안을 가결했을 때 찬반 숫자다. 민주-공화당이 매사에 첨예하게 맞서고 당론 투표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반대한 공화당 의원 8명도 정상무역관계 단절에 동의하지만 법안에 포함된 인권 관련 제재 조항이 대통령에게 지나친 권한을 준다며 반대표를 던졌을 뿐이다. 그 이틀 전 상원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의 전쟁범죄 혐의를 조사해야 한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1년 9·11테러 사흘 뒤 응징을 위해 “모든 필요하고 적절한 군사력”의 사용 권한을 대통령에게 주는 법안을 하원은 420 대 1, 상원은 표결 참여 98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했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 의회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대응에서 또하나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했다. 특히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두 차례 상하원 의원들을 상대로 화상 연설을 하면서, 의회가 침공당한 국가의 정상에게 지원 요구를 직접 듣는 역할까지 맡았다. 외교·안보는 대통령의 주도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하던 전통과는 멀어진 모습이다.
초당적 단결과 공세적 태도는 러시아에 대한 여론의 반감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푸틴 대통령의 행동이 미국과 유럽의 단결을 촉진하는 ‘역효과’를 부른 것처럼 미국 여론과 정치권의 단결도 이끌어낸 셈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측근인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은 “이처럼 단결된 모습을 다른 데서 찾으려면 9·11 때로 돌아가야 한다”고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미국 여론은 그만큼 강경하다. 15일 발표된 퓨리서치센터의 1만441명 상대 조사에서 32%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금 수준의 지원이 적절하다고 평가했는데, 42%는 지원을 더 하자고 했다. 35%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충돌의 위험이 있더라도 미국의 군사 개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양당 지지층이 거의 같은 비율(공화 51%, 민주 50%)로 이번 사태를 미국의 이익에 대한 중대 위협이라고 규정한 점도 눈에 띈다.
양당 의원들은 강경 대응 의견은 비슷해도 동기가 일부 다르다. 민주당은 바이든 대통령을 뒷받침하려는 뜻이 강하다. 반면 공화당은 바이든 대통령을 깎아내리려고 강경 대응을 주문하는 측면이 있다. 공화당 지도부는 “대통령은 일관되게 유화책을 택했다”며, 이런 태도가 러시아에게 기회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의회의 적극성에 백악관이 끌려가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7일 의회가 러시아산 석유 금수 법안을 만들겠다고 밝히자 이튿날 석유 금수를 발표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리 영공을 지켜달라”는 연설을 한 이튿날인 17일 슬로바키아가 미국 등의 대체 무기 지원을 전제로 S-300 대공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주겠다고 한 것도 이런 패턴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당시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이 슬로바키아를 방문 중이었다.
의회의 압박은 대러 제재는 물론 군사원조에도 작용해 전쟁 양상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최근 우크라이나에 휴대용 대전차미사일과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추가 공급하면서 첨단 무기인 ‘스위치 블레이드’ 드론 100개도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은 휴대가 간편하고 목표물에 적중하면 폭발해 ‘가미카제 드론’으로도 불리는 이 무기를 대량 제공할 준비도 하고 있다. 또 미국이 슬로바키아와 터키를 통한 제공을 추진하는 러시아제 S-300 미사일은 휴대용 대공미사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러시아군의 제공권을 크게 흔들 수 있어 우크라이나가 지원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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