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의 폭격으로 크게 파괴된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극장의 21일 촬영 위성사진. 이곳에 대피해 있던 민간인들이 다수 희생됐다. AP 연합뉴스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공식적 판단을 발표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23일(현지시각) 성명을 내어 “미국 정부는 현재 입수 가능한 정보에 근거해, 러시아군 구성원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우리의 판단은 공개적인, 또는 정보 경로를 통해 입수 가능한 정보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에 근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블링컨 장관은 아파트, 학교, 병원을 대상으로 고의적으로 민간인들을 노린 무차별적인 공격에 대한 “신뢰할 만한 보고들”을 이런 판단의 근거로 들었다. 우크라이나 도시들에 대한 포위 공격을 벌이는 러시아군은 개전 초기에는 군사적 목표물에 집중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민간 지역과 시설에 대한 포격과 미사일 공격을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군이 민간인들이 대피해 있는 대규모 시설 등을 표적으로 삼아 공포의 확산을 노린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특히 우크라이나 남부 마리우폴에서 공중에서도 볼 수 있도록 “어린이들”이라고 러시아어로 써서 알린 극장과 조산원이 공격 받은 것을 민간인들에 대한 의도된 공격이라고 지적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1일 마리우폴이 “잿더미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미국의 공식 판단은 러시아에 책임을 물으려는 움직임에서 중요한 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주 “나는 푸틴이 전범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블링컨 장관도 이에 “개인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발표는 미국 정부가 개인적 판단을 넘어 전쟁범죄 발생을 ‘공식화’했다는 의미가 있다.
블링컨 장관은 성명에서 “전쟁범죄 혐의에 관해서는 관할권을 지닌 재판소가 특정 사건들에 책임이 있는 범죄자를 가려야 한다”고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앞서 전쟁범죄 혐의 조사에 착수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미국이 수집한 자료를 넘기겠다고 했다. 국제형사재판소와의 공조로 전범 혐의자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게 미국의 구상이다.
최근 임명된 베스 밴 스커크 국무부 국제사법 특사는 이날 브리핑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군의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냐는 질문에 “국제법과 국내법에는 지휘 계통의 최상위까지 (처벌 범위가) 닿을 수 있는 원칙이 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전범 책임을 부과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미국 국무부의 이번 발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24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러 출국하는 것과 맞춰 이뤄졌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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