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건설 중인 유대인 정착촌. 서안지구/EPA 연합뉴스
미국이 이스라엘 정부의 요르단강 서안지구 정착촌 확대 계획을 강도 높게 비판한 지 이틀 만에 정착촌 건설 중단을 요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이스라엘 앞에서는 작아지는’ 모습이 재연된 것이다.
버던트 파텔 미국 국무부 수석부대변인은 16일 브리핑에서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초안을 회람하고 있는 정착촌 관련 결의안에 대해 “‘두 개의 국가’ 해법을 위한 협상 진전에 필요한 조건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파텔 수석부대변인은 미국이 안보리 표결에서 거부권을 행사할지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새 정착촌 건설 계획 취소와 기존 정착촌 철거를 요구하는 결의안은 20일께 안보리에서 표결이 이뤄질 예정이다. 결의안은 무력으로 영토를 확보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유엔헌장을 재확인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번 논란은 지난해 12월 재집권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끄는 초강경파 정부가 이달 12일 정착촌 9개를 소급해 합법화하는 한편 기존 정착촌들에 주택 1만채를 추가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불법으로 규정한 국제사회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정책에 미국 등은 강하게 반발했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외교장관들은 14일 공동성명을 내어 이스라엘의 행위를 “매우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서구의 주요 5개국이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낸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네타냐후 정부의 정착촌 대규모 건설 계획은 지난달 말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방문해 정착촌 확대를 비판한 직후에 발표된 것이어서 미국의 뒤통수를 친 격으로도 볼 수 있다. 블링컨 장관은 5개국 외무장관 공동성명에 참여하는 한편 전날에는 개인적으로 “우리는 갈등을 악화시키고 협상을 통한 ‘두 국가 해법’의 전망을 약화시키는 일방적 조처에 강하게 반대한다”는 성명도 냈다. ‘두 개의 국가 해법’이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전 영역을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의 국가로 성립돼 평화적으로 공존하자는 개념이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당시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안지구를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지 않는다.
백악관도 당혹감을 표현하고 있다. 커린 잔피에어 백악관 대변인은 16일 이스라엘의 조처에 “깊이 실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안보리 결의안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면서 미국 정부의 진의는 다시 의심받게 됐다. 불과 이틀 전 이스라엘이 ‘두 개의 국가’ 해법을 어렵게 만든다고 비난한 미국이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결의안도 ‘두 개의 국가 해법’에 도움이 안 된다며 모순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에이피>(AP) 통신은 익명의 유엔 주재 외교관을 인용해 미국이 결의안을 이보다 수준이 낮고 구속력이 없는 안보리 의장성명으로 대체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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