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백악관에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한 뒤 펜을 교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러시아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냉전 이후 핵심 군축 협정인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에 대해 각각 탈퇴와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그 밖에 다른 군축 협정들도 잇따라 폐기의 길을 걷고 있어, ‘신냉전’ 도래와 함께 지난 30여년간 유지돼온 군비 경쟁의 고삐가 완전히 풀리는 모습이다.
러시아 외교부는 7일 “우리는 재래식 군축 협정을 되살리려고 대화의 문을 열어놨지만 상대는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다”며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러시아는 지난 5월에 6개월 뒤 이 조약에서 탈퇴하겠다는 국내 절차를 마무리한 상태였다.
러시아의 발표에 나토는 즉각 반응했다. 나토 이사회는 성명을 내어 “러시아의 탈퇴는 유럽·대서양 안보를 약화시키는 가장 최근의 움직임”이며 “러시아는 군축 조약을 계속 무시해왔다”고 비난했다. 나토는 러시아가 이미 2007년부터 조약 참여 중단을 선언하고 정보 제공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만 조약을 지키는 것은 자해 행위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이날 별도 성명을 내어 조약 참여를 중단하게 됐으니 “(나토) 동맹국들도 억제력과 방어 능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조약은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와 소련이 이끄는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냉전이 종식되던 무렵인 1990년에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양쪽은 대서양과 우랄산맥 사이에서 탱크, 장갑차, 중포, 전투기, 공격 헬리콥터 등의 수를 동일하게 유지하고, 무기 배치 정보도 교환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탱크와 같은 재래식 전력으로 서로를 기습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한 것이다. 옛 소련 진영에 쌓여 있던 방대한 재래식 무기고를 두려워하던 유럽 국가들을 안도하게 만든 조약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1991년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된 뒤에도 이 조약은 효력이 유지돼왔다. 하지만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 등을 이유로 2007년 참여 중단을 선언하고 정보 제공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 러시아는 지난 5월 탈퇴를 예고하면서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 추진을 명분으로 꼽았다. 러시아는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은 이웃 나라 핀란드가 나토에 들어간다면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력 집결지로 활용될 수 있다며 반발했다.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은 핵군축 조약인 중거리핵전력조약(INF)과 함께 냉전 해체, 유럽의 평화 정착, 미-러의 긴장 완화를 상징하는 핵심 조약이었다. 하지만 유럽을 사정권에 두는 지상 발사 핵미사일 배치를 금지하는 중거리핵전력조약이 2019년 8월 미-러의 책임 공방 속에 휴지 조각이 된 뒤 이 조약도 완전한 폐기 수순에 접어들게 됐다. 나토는 애초 러시아처럼 조약에서 완전히 탈퇴하는 안도 논의했으나 신중론이 부상하면서 참여 중단으로 의견을 모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조처로 미국은 우크라이나 주변국인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등에 군사력을 전개하기가 더 용이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올해 2월에는 실전 배치 핵탄두와 운반 수단을 제한하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달 2일에는 미국은 비준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비준도 철회한 바 있다.
한편, 군축을 둘러싼 미-러의 극단적 대립 분위기와는 달리, 7일 워싱턴에서는 맬러리 스튜어트 미국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보와 쑨샤오보 중국 외교부 군축국장이 참여한 핵군축 회담이 열렸다. 국무부는 구체적 목표를 지니지는 않은 이 회담에 대해 “솔직하고 깊이 있는” 논의가 진행됐다고 전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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