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시각) 밤, 자신의 패배가 사실상 확정된 뒤 뉴햄프셔주 주도 콩코드에 마련된 선거운동본부 연단에 오른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우리는 절반에 가까운 표를 얻었다”며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상대를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표현을 삼가해온 그는 독이 오른 듯 “민주당은 조 바이든이 패배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화당 후보가 트럼프임을 안다”며 “그를 후보로 내세우면 바이든에게 승리를 안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헤일리 전 대사가 지난 15일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 이어 이날 치러진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도 거푸 패하며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결정적인 열세에 놓이게 됐다. 그는 이날 후보 사퇴를 하는 대신 굴하지 않고 경선을 이어가겠다는 투지를 다졌다. 이에 견줘 여유 있게 2연승을 거둔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과 ‘리턴 매치’를 거의 예약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뉴햄프셔주 내슈아의 선거운동본부에서 한 승리 연설에서 헤일리 전 대사가 “마치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연설했다”며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또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2위를 하고 사퇴했는데도 3위를 한 헤일리 전 대사는 남아 있다고 조롱했다.
미국 50개 주에서 치러지는 공화당 경선에서 불과 처음 두개 주의 결과가 나왔을 뿐이지만, 승부의 추가 크게 기울었다는 말이 나오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아이오와(40명)와 뉴햄프셔(22명) 2개 주의 대의원 수를 더하면, 전체 2429명의 2.6%에 불과하다. 두 주 선거인단은 승자 독식이 아니라 득표율대로 배분된다. 하지만 가장 먼저 코커스와 프라이머리가 열리는 두 주의 경선 경과는 예로부터 본선에 나서는 대선 후보를 정하는 여론의 바로미터 역할을 했다. 이 두 주의 승부 결과가 선거자금 기부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그에 따라 이후 48개 주의 경선 결과를 좌지우지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수십년간 이어져온 공화당 내 경선 기록을 무너뜨리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우선 아이오와에서 2위 디샌티스 주지사에게 30%포인트가량 앞서면서 역대 아이오와 경선 1·2위 최다 격차 기록(약 13%포인트)을 깼다. 1976년 이래 처음으로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경선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기록도 세웠다. 전국 공화당 지지층의 60%가량이 그를 지지하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변이 아니고서는 그의 앞길을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압승을 거둔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공화당 내 표심이 결집했다는 점이다. 이날 엔비시(NBC) 방송 출구조사에서 공화당 성향, 무당파 성향, 민주당 성향이라는 유권자의 비율은 각각 49%, 45%, 6%였다. 뉴햄프셔는 공화당원만 투표할 수 있는 아이오와와 달리 무당파로 등록된 유권자도 투표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자신을 공화당 성향이라고 밝힌 이들의 절대다수인 74%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택했다. 헤일리 전 대사에게 투표했다는 이는 25%에 불과했다. 무당파에서는 헤일리 전 대사가 61%로 트럼프 전 대통령(37%)을 앞섰다. 헤일리 전 대사는 무당파도 투표할 수 있는 프라이머리 제도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공화당원의 절대다수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며 승부가 갈렸다.
전통적으로 아이오와 코커스 결과에 대해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온 두번째 경선주인 뉴햄프셔에서도 패한 헤일리 전 대사는 ‘벼랑 끝’에 몰렸다. 1980년부터 공화당 소속 현직 대통령이 재출마하는 경우를 빼고 실질적 경쟁이 이뤄진 일곱차례 경선에서 아이오와 1위는 두차례, 뉴햄프셔 1위는 다섯차례 본선 후보가 됐다. 뉴햄프셔 승자가 최종 후보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헤일리 전 대사의 이번 패배는 더 뼈아프다. 이 패턴을 따른다면 둘 중 한 곳에서는 1위를 차지해야만 했다. 그는 뉴햄프셔 경선이 아이오와의 결과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했지만 말처럼 되지 않았다.
특히 뉴햄프셔는 다른 주들보다 헤일리 전 대사에게 유리하다는 평가가 이어져왔다. 대부분이 농촌인 아이오와와 달리 뉴햄프셔는 도시와 그 교외 지역에 고학력자들이 많고, 온건·중도 성향이 짙은 편이라서다. 뉴햄프셔에서도 패한 헤일리 전 대사가 다른 주에서 반전의 계기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제 헤일리 전 대사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고향이며 2011년부터 6년간 주지사를 한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에 나서게 됐다. 그는 다음 경선인 2월8일 네바다 코커스에는 등록도 하지 않았다. 2월24일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에서 선전해야 14개 주가 경선을 치르는 3월5일 ‘슈퍼 화요일’에 승부를 걸 수 있다.
물론 상황은 녹록지 않다. 최근 사우스캐롤라이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50%가량, 헤일리 전 대사는 20%가량의 지지를 얻고 있다. 둘의 격차는 무려 30%포인트에 이른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지역구인 팀 스콧 상원의원, 헤일리 전 대사가 주지사일 때 부지사를 한 헨리 맥매스터 현 주지사마저도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를 선언했다.
이곳에 지역구를 둔 낸시 메이스 공화당 하원의원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사우스캐롤라이나는 헤일리를 좋아하지만 트럼프는 사랑한다”고 했다. 헤일리 전 대사는 뉴햄프셔 투표소에서 “우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더 강해질 것”이라고 했지만 상황을 불과 한달 만에 뒤집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게 됐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