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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미국 예비선거 현장의 ‘외눈박이’ 거인

등록 2016-03-14 22:36수정 2016-03-16 14:20

[기고]
도널드 트럼프.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연합뉴스

요즘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장에서 외모 논쟁이 한창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지지를 받으며,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의 선두주자로 급부상하자, 위기감을 느낀 라이벌 마코 루비오가 트럼프의 ‘작은 손’을 꼬투리잡았고, 이에 맞서 트럼프는 루비오의 상대적으로 작은 키와 몸집을 꼬집어, ‘경량급 루비오’ ‘소인 루비오’로 지칭하며 반격을 시작했다. 트럼프는 한술 더떠 지난 3월 3일 디트로이트의 공화당 대선토론회에서 아예 직격탄을 날렸다. 청중들에게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보이며, 그의 손이 과연 작은 것인지, 만약 작다면 ‘다른 무엇’도 작아야 하는데, 그 물건의 크기에 관한 한 “아무 문제 없다”고 누차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청중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든 것 말고 그 직격탄의 효과는 별로 없는 듯하고, 정작 그 피해 당사자가 루비오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건 미국 버지니아 주 알링턴 초등학교 5학년생들의 공화당 대선토론에 대한 반응을 담은 비디오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 짧은 비디오에서 어린이들은 트럼프를 또래들을 힘으로 누르고 협박하는 ‘골목대장(bully)’에 비유한 뒤, 막말이 난무하는 TV 토론회에서 자신들이 배울 게 없다며, 이제 그만 어른이 되시라고 점잖게 충고한다.

말 그대로 이전투구, 진흙탕의 개싸움을 연상시키는 공화당 예비선거 현장을 지켜보면서 흔히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등장하는 인물, ‘시티즌 (the Citizen)’이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그리스 신화나 호머의 『오디세이아』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를 알고 있을 테지만, 조이스는 이 키클롭스를 20세기 초, 식민지 상황에 놓인 고국 아일랜드의 정치, 사회 현실에 맞춰 시티즌이라는 인물로 재창조했다. 조이스는 술집 한 구석에 온종일 붙어 앉아 공짜 술을 얻어 마시며 격렬한 정치 논쟁을 일삼는 시티즌의 모습을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키클롭스로 비유하여 희화화한다. 한때 포환던지기 전국 챔피언답게, 시티즌은 거구이다. 그의 떡벌어진 어깨,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 불그레한 얼굴, 거센 털로 뒤덮인 사지, 우뚝 솟은 큰 키 등 거인의 풍모와 사나운 기질은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자칭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 게일릭(Gaelic) 문화부흥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그는 전통 의상인 튜닉을 입고 허리끈을 질끈 동여맨 모습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시티즌과 도널드 트럼프는 외모에 있어 상관성이 있어 보인다. 작은 키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미국 대통령들은 전통적으로 키가 컸지만, 트럼프는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으로 토론 무대에서 다른 후보들의 머리 위로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한다. 한때, ‘소인 마코’ 대 ‘거인 도널드’의 치고받는 격전과 더불어 트럼프의 ‘오렌지색’ 불그레한 얼굴을 둘러싸고 그 연원이 무엇인지, 선탠용 침대에서 일부러 태워 그렇게 된 건 아닌지 등의 열띤 논쟁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던 걸 보면, 게일릭 혈통의 발현으로 시티즌과 트럼프가 그들의 먼 조상을 공유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어, 인터넷 도처에 그의 찡그린 얼굴이 한층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범람하고 있지만, 조이스가 묘사하는 시티즌의 불만에 찬 성난 모습도 두 인물이 공유한 속성임에는 틀림없겠다.

그러나 정작 외모보다 더 닮은 건 시티즌과 트럼프의 이데올로기이다. 게일릭 순수 혈통주의를 주창하는 시티즌은 헝가리 이민의 후손이자 유대인인 작품의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을 대놓고 민족의 순수성을 좀먹고 나라를 오염시키는 이방인으로 매도하면서, 매사에 ‘우리’ 대 ‘그들,’ ‘친구’와 ‘적’으로 선을 가르고 벽을 쌓는다. 아버지 대에 아일랜드로 이민 와, 아일랜드에서 낳고 자라 아일랜드의 국민이 된 블룸과 같은 이들을 배격하는 시티즌의 모습을 조이스는 민족주의와 애국심으로 포장된 편협한 외눈박이 국수주의자로 희화화하고 있지만, 시티즌과 같이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고, 타자에 대한 증오와 배타주의를 선동하는 데마고그가 비단 소설 속에 존재하는 악한일 뿐 아니라, 21세기 미국에서 열광적 인기를 얻고 있는 대통령 후보라는 건 현대판 아이러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트럼프는 미국 사회의 이민자들을 미국 사회의 암적 존재로 몰아세우고, 1,100만에 이르는 불법이민자를 본국으로 즉시 송환하겠다고 공약하며, 마약과 불법이민의 원흉으로 멕시코를 지목하여, 멕시코와의 국경에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장벽을 멕시코 부담으로 세울 것을 주장하고,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미국 입국을 거부하며, 이슬람교도의 이민이나 방문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테러리스트의 가족까지 모두 죽여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 전쟁범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시티즌과 트럼프의 유사점은 앞에서 언급한 트럼프의 성기의 크기에 대한 암시에서도 발견된다. 시티즌과 그의 패거리들은 블룸과 같은 사회의 타자나 약자들을 남성성이 부족한 중성(中性)이라고 모욕한 뒤, 아일랜드의 애국자 조 브래이디가 처형장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그의 성기가 처형자들을 향하여 부지깽이처럼 불끈 서 있었다는 소문을 인용하면서, 진정한 애국자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중요한 신체 부위를 이용하여 대영제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다고 주장한다. 애국심과 남성성을 동일시하는 이 논리에 대해 블룸은 밧줄에 목이 졸리는 순간 피가 아래로 몰리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나름 과학적인 설명을 하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선동자의 열띤 애국주의에 침식당하고, 이성의 논리는 성난 군중들에게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남성성과 민족주의 혹은 애국심을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트럼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조이스가 창조한 소설 속의 인물들과 닮아 있다. 트럼프가 자신의 성기의 크기를 공개적으로 자랑했을 때, 그것은 자신이 강력한 지도자이며, 따라서 자신이 약속한 난제들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힘의 소유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시티즌과 그의 패거리들이 내면화한 남성성과 힘센 지도자에 대한 맹신의 이면에 늘 따라 다니는 여성혐오증은 트럼프가 경선에 나선 뒤, 거듭 여성 혐오 내지 경멸적 발언을 일삼은 행태에서 그 유사성이 잘 드러난다. 트럼프는 토론장에서 지금은 퇴진한 공화당 후보 칼리 피오리나에게 “저 여자는 왜 언제나 남의 발언 도중에 끼어드냐”는 황당한 발언으로 청중을 놀라게 하기도 했고, 어려운 질문들로 자신을 당황시킨 폭스뉴스 앵커 메건 켈리를 매력은 있으나 머리가 빈 ‘빔보 (bimbo)’라는 극단적인 언어로 매도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문제는 상식 이하의 발언과 극단적인 공약을 남발하고 있는 이 외눈박이 거인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예상 외로 많다는 것인데, 상식을 뒤엎는 이 기묘한 미국 사회의 현상은 따지고 보면 전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전에 갑자기 나타나,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라 페일린과 티 파티 현상도 트럼프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재의 미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전통적 가치의 약화와 우중사회의 천박한 민낯을 백일하에 드러낸 예비선거의 기현상은 최근 정치학자들 일각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대로 미국 사회에서 부상하고 있는 전체주의적 성향과 공화당 우파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기득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깊숙한 이데올로기적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종래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누렸던 헤게모니의 쇠퇴와 테러의 위협, 경제적 침체와 실업,
이종임 박사
이종임 박사
그리고 미국 사회 내의 다민족, 다문화주의의 가속화 등, 미국 사회의 대내외적 변화에 따른 위기의식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런 면에서 트럼프는 ‘징후’일 뿐이라는 학자들의 진단은 새겨들을만하다.

거의 100년 전,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식민지 상황과 더불어 반유태주의와 파시즘을 불러왔던 유럽의 위기 상황을 통찰하여 『율리시즈』의 ‘키클롭스’ 챕터로 재현했지만, 1세기가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조이스는 그런 위기 상황 속에 떠올라 타자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설파하여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상식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선동자들을 식별하는 혜안을 가질 필요를 우리 모두에게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임

이종임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위스콘신주 매디슨 소재)에서 20세기 영미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위스콘신대, 네브래스카대, 고려대 등에서 강의했다. 현재 한국문화와 미국 흑인문화의 접점을 밝히는 책을 쓰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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