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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카스트로 체제 반세기…혁명수호냐 전격개방이냐

등록 2016-05-01 19:53수정 2016-05-01 20:51

국제 초점 I 쿠바 ‘포스트 혁명시대’ 갈림길

반세기만의 미국 수교 복원
오바마 방문 ‘화해 손짓’
혁명 1세대, 개혁 수위 고심

미 제재로 자급경제 오랜 피폐
시장경제 허용 등 궤도 변경 움직임

카스트로 “혁명 완수” 외침 속
동생 라울 실용주의로 선회
‘포스트 혁명’ 전망 아직은 안갯속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시장 과일가게 벽면에 쿠바 혁명을 이끈 피델 카스트로(맨 오른쪽)와 라울 카스트로(가운데)의 사진이 걸려 있다.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이후 경제봉쇄 해제에 따른 활력을 기대하고 있다.  아바나/EPA 연합뉴스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시장 과일가게 벽면에 쿠바 혁명을 이끈 피델 카스트로(맨 오른쪽)와 라울 카스트로(가운데)의 사진이 걸려 있다.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이후 경제봉쇄 해제에 따른 활력을 기대하고 있다. 아바나/EPA 연합뉴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지금을 경계해야 합니다. 외부의 강대 세력이 민간 부문을 강화해 변화를 유도하고 혁명을 끝장내려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난달 16일 쿠바 수도 아바나. 5년 만에 쿠바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가 열렸다. 라울 카스트로(84) 국가평의회 의장은 그의 형이자 쿠바 혁명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89)의 대형 초상화가 걸린 컨벤션홀에서 2시간 동안 연설을 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이어 경제봉쇄 해제를 앞두고 정책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전당대회는 ‘변화’보다 ‘체제 수호’에 방점이 찍혔다.

■ 혁명 1세대의 고민 라울은 일당독재에 대한 안팎의 비판을 두고는 “그들이 우리를 분열시키면 사회주의 혁명과 국가 독립의 종말이 시작될 것”이라며 완강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미국에 민주당과 공화당이 있지만 너무 비슷해 하나같다. 쿠바에 양당이 있어서 피델이 하나, 내가 하나를 이끄는 것과 똑같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불과 한달 전 쿠바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한 것도, 앞서 2015년 7월 두 나라가 국교 정상화를 공식 선언한 것도 마치 없었던 일 같았다.

반세기가 넘도록 쿠바를 이끌어온 혁명 1세대가 닥쳐오는 변화의 물결 앞에서 개혁개방의 수위와 완급 조절에 고심하고 있다. 라울은 점진적 경제개혁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그것이 자본주의로 가는 길은 아니며, 사회적 소유가 더 바람직하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궤도 수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피폐한 경제와 권위주의적 통치에 지친 국민들의 변화 요구가 거센데다, 상당수가 70~80대로 고령화한 핵심 지도부의 세대교체도 눈앞의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전당대회 이틀째인 17일, 라울은 “미래의 쿠바 공산당 지도자는 70살이면 은퇴하고 젊은 피에게 길을 내주자”며 당직 상한 연령을 제시했다. 당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상한 연령은 60살로 낮추고, ‘젊은 피’ 수혈을 정부 기구 전체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썰렁한 침묵이 감돌았다. 일부 대의원들의 얼굴엔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라울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달랬다. “너무 심각하군요. 이 주제가 이렇게 정적을 부를 줄이야. 국가의 지도부에 있을 수 없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원으도 계속 활동할 수 있고 손자들과 더 많은 시간을 지낼 수도 있습니다.”

19일 전당대회 폐막식에선 피델 카스트로가 9개월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나를 이 자리에 초청해주어 고맙다”고 운을 뗀 뒤, “나는 곧 90살이 된다. 이번이 내가 이곳에서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사실상의 고별사를 이어갔다. 핵심은 ‘혁명 완수’였다. 그는 “쿠바 공산주의 사상은 인간이 열성과 품위를 가지고 일하면 필요한 물질적, 문화적 재화를 생산할 수 있다는 증거로 남을 것”이라며 끊임없는 투쟁을 당부했다. 임기 5년의 공산당 제1서기에 연임된 라울도 “이번 전당대회는 혁명 세대가 이끄는 마지막 전당대회가 될 것”이라며 2018년에 국가평의회 의장에서 물러나겠다고 거듭 확인했다.

앞서 지난 3월2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했다. 정상회담에서 라울과 오바마는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 해제와 화해에 합의했다. 그러나 관타나모 미군 기지 반환, 쿠바의 인권 문제 등에 대해선 팽팽한 시각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그로부터 꼭 일주일 뒤, 피델 카스트로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에 쓴 글에서 “제국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선물도 필요 없다”며 여전히 날 선 반미 감정을 드러냈다. 피델은 “오바마가 달콤한 말로 연설했지만, 이 고귀하고 이타적인 나라의 사람들이 교육, 과학, 문화의 발전을 통해 이룩한 영광, 권리, 정신적 풍요를 포기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강조했다.

■ 변화에 밀려나는 과거 쿠바에서 미국 남부 플로리다까지는 겨우 150㎞ 남짓, 서울에서 대전 거리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두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멀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의 슈퍼파워였고, 쿠바는 그 턱밑에서 사회주의의 기치를 움켜쥔 작은 섬나라였다. ‘쿠바식 사회주의’ 체제와 자존심을 지키는 대가는 혹독했다. 미국은 전면적 금수 조처로 쿠바의 경제를 옥죄고 고립시켰다. 쿠바는 협동조합 농업과 자급자족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전면 무상교육과 질 높은 무상의료를 시행했지만 전반적인 살림살이는 고달팠다. 1990년대 냉전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두 나라 사이의 시계는 한참이나 멈춰 있었다.

미국은 쿠바 혁명 직후부터 집요하게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했다. 2006년 영국의 <채널4> 방송은 쿠바 비밀보안국장을 지낸 파비안 에스칼란테의 증언을 토대로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폭발물 시가, 독극물 우유, 옛 애인, 폭탄 조개, 고압 전기 등 온갖 기발한 수단을 동원했으나 실패했다. 카스트로는 “올림픽 경기 종목에 ‘암살 모면하기’가 있다면 내가 금메달일 것”이란 농담을 한 적도 있다.

변화의 조짐은 2008년 피델이 동생 라울에게 권력을 넘겨준 뒤에 찾아왔다. 라울은 피델보다 훨씬 실용주의적인 정책을 폈다. 비대한 관료조직을 줄이고, 민간 부문의 자력갱생을 장려했다. 노동자 점심 배급도 사라졌다. 2011년부터는 개인이 기른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됐고, 소기업 창업과 주택 매매도 허용됐다. 미국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최근 “이런 변화는 발달한 시장경제 기준으로 보면 걸음마 수준이지만, 라울 카스트로 버전의 ‘글라스노스트’와 병행됐다”고 평가했다. 글라스노스트는 1980년대 중반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실시한 제한적 개혁개방 정책이다.

지난 3월11일 아바나 시내 광장에선 작은 소란이 일었다. 쿠바 정치범 아내들 모임인 ‘흰옷의 여성들’(다마스 데 블랑코. 영어 레이디스 인 화이트)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문에 때맞춰 민주화 시위를 벌이려다 한때 구금된 것이다. 이 단체는 이미 몇년 전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남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 행진을 벌여왔다. 피델 집권 시기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소수자 인권 증진도 눈에 띈다. 쿠바 혁명 직후 동성애자들은 ‘혁명적 개조’를 위해 투옥되거나 중노동에 처해졌다. 2010년 피델은 멕시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동성애자 차별은 엄청난 불의였으며, 내 책임이다. 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미국의 위협과 미사일 위기 등 다른 문제들로 정신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피델의 조카이자 라울 의장의 딸인 마리엘라 카스트로 의원은 2014년 쿠바 의회에서 에이즈 바이러스(HIV) 보균자나 성소수자 보호 조항이 빠진 노동자권리법안에 ‘나홀로 반대’표를 던졌다.

<폴리티코>는 “쿠바의 지속적인 변화는 미래의 지도자들이 정치적 반대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느냐에 달려 있다”며 “그 변화의 기반이 마리엘라 의원처럼 방패막이가 있는 권력 핵심부에서 시작된다면 엄청난 역설이 될 것”이라고 촌평했다. 쿠바의 포스트 혁명 시대의 미래는 아직 어둠 속에 있다. 오랜 계획경제의 체질 개선과 개혁개방의 연착륙 등 당면한 도전도 만만치 않다. 국가발전 로드맵의 큰 그림은 5년의 과도기를 거쳐 2021년 제8차 전당대회에서 선뵐 가능성이 크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 은퇴를 앞둔 혁명 1세대에게 5년은 길고도 짧은 시간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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