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사흘째인 20일(현지시각)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찬조 연설자로 나서 연설을 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대선 경선을 펼쳤던 크루즈 상원의원은 끝까지 트럼프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지 않고 공화당원들에게 “양심에 따라 투표하라”고 해 야유를 받았다. 클리블랜드/AP 연합뉴스
“트럼프! 트럼프!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의 ‘친위 부대’인 뉴욕주 대의원들이 연설 마지막 부분을 남겨둔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라는 압박이었다. 여기저기서 “우우~” 하는 야유도 쏟아졌다. 크루즈가 “11월 양심에 따라 투표하자”며 찬조 연설을 마무리하자, 야유는 대회장 전체로 번져나갔다.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전대) 사흘째인 20일, 크루즈는 끝내 트럼프를 공화당 후보로 인정하지 않았다. 되레 공화당 축제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됐다. 그의 연설에 이어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 그리고 이날 전대의 최고 하이라이트인 마이크 펜스 부통령 후보의 수락 연설이 예정돼 있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 ‘반트럼프’ 진영의 사소한 반란들을 비교적 무난히 넘겼는데 셋째 날에 이르러 불거진 크루즈의 반란은,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 내부의 반감과 분열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밤 10시를 넘어 크루즈가 연단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그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특히 연설 첫머리에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것을 축하한다”고 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연설이 끝나갈 때까지 명시적인 트럼프 지지 선언이 없자, 분위기는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위스콘신에서 온 한 대의원은 “‘트럼프를 지지한다, 추인한다, 찍어달라’는 세 단어 중 하나가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크루즈 의원이 연설을 마무리지을 무렵, 부통령 후보 마이크 펜스를 지원하기 위해 트럼프가 대회장에 ‘깜짝 등장’하던 상황이었다.
트럼프는 행사 뒤 크루즈의 연설에 대해 트위트를 통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파장을 줄이려 애썼지만, 크루즈의 이날 저항은 ‘트럼프 공화당’의 미래가 간단치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크루즈는 일종의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가 11월 대선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패하면 크루즈는 2020년 공화당 대선의 가장 유력한 잠룡으로 부상할 수 있다. 그가 트럼프에게 여전히 반감을 갖고 있는 주류의 정치적 이해를 앞장서 대변해줬기 때문이다. 반면,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기면 그는 정치적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 벌써부터 트럼프 진영에선 “크루즈는 정치적으로 사망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로선 당 주류들을 껴안으며 단합을 끌어내야 하는 과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는 전당대회장인 ‘퀴큰론스 아레나’ 근처에서 벌어지는 오하이오주 대의원들의 정치행사에만 나타날 뿐, 전당대회에는 얼굴도 비치지 않고 있다. 오하이오는 대표적인 경합주(스윙 스테이트)여서 트럼프가 반드시 끌어안아야 할 지역이다. 크루즈 역시 히스패닉계인데다, 공화당 ‘집토끼’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복음주의 기독교 및 강경 보수세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트럼프 진영 내부에서도 책임 문제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멜라니아의 연설 표절 논란으로 가뜩이나 어수선한데, 크루즈를 찬조 연설자로 집어넣은 ‘관리 미숙’에 대한 책임자 문책 여론이 내부에서 나올 수 있다.
공화당의 단합을 호소한 부통령 후보 펜스의 수락 연설은 빛이 바랬다. 펜스는 트럼프에 대해 “사업에서도 성공했으나 노동자들을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고 추어올렸다. 펜스는 트럼프의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고 연설을 마무리했고, 트럼프는 무대에 나와 펜스 얼굴에 키스를 하는 시늉을 하며 격려했다.
클리블랜드/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