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미국 뉴욕주 헴프스테드의 호프스트라 대학에서 열린 1차 텔레비전 토론이 끝난 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무대를 떠나고 있다. 헴프스테드/AFP 연합뉴스
26일 치러진 미국 대선 후보 첫 텔레비전 토론이 끝난 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는 “마이크가 불량이었다”, “사회자가 편파적이었다”, “클린턴이 알리샤 마차도를 마치 ‘마더 테레사’인 것처럼 떠들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티브이 토론에서 완패를 당한 뒤 쏟아낸 역정이다. 트럼프는 토론에 활용할 대사까지 꼼꼼하게 준비한 ‘공부벌레 모범생’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치밀함에 크게 한방 먹었다.
클린턴은 트럼프가 티브이 토론에서 공세를 펼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각각의 사안에 어떤 발언으로 대응할 것인지 시뮬레이션까지 준비했다고 27일 <시엔엔>(CNN) 방송이 클린턴 캠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토론에서 트럼프는 “클린턴이 토론 준비하느라 공식 일정마저 중단했다”고 비판했는데, 클린턴은 “토론뿐 아니라, 대통령 되는 것도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응수했다. 얼핏 보면 잘 받아친 순발력 있는 즉흥 발언 같지만, 실은 이 ‘대사’ 역시 미리 준비한 것이다.
클린턴의 치밀함은 트럼프의 성차별적 발언 지적에서도 잘 드러난다. 클린턴은 베네수엘라 출신의 1996년 미스 유니버스 알리샤 마차도의 인터뷰 영상을 미리 준비해 둔 채로, 이를 토대로 “트럼프는 여성을 ‘미스 돼지’, ‘미스 가정부’라 부른다…그녀의 이름은 알리샤 마차도”라고 주장했다. 전혀 예상못한 기습공격에 당황한 트럼프는 “그런 걸 어디서 알았느냐”는 말만 되풀이할 뿐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클린턴 캠프는 이튿날인 27일 트럼프의 차별적 발언을 증언하는 마차도와의 인터뷰 영상을 공개했고, 덕분에 트럼프는 연이틀 궁지에 몰린 셈이 됐다.
날카로운 질문으로 잘 짜여진 90분, 사회자의 최소화된 개입, 상대방과 1 대 1로 싸워야 하는 대선 토론 형식이 애초 트럼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홈그라운드’ 격이었던 공화당 경선 티브이 토론에선 물 만난 물고기처럼 토론을 주도했다. 이민자 규제, 멕시코 장벽 등 논란이 되는 이슈들을 선점했고, 여러명의 후보가 대거 등장한 토론에서 마코 루비오·테드 크루즈·젭 부시 등의 후보들을 하나로 묶으며 거침없고 과격한 발언과 쇼맨십으로 ‘트럼프 대 나머지’라는 구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선 본선 티브이 토론은 ‘공화당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자리가 아니고, 클린턴도 공화당 후보들과는 접근법 자체가 달랐다. 이미 트럼프는 본선이 다가올수록 기존 지지자들이 기대하는 ‘트럼프다움’과 일반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대통령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 이는 토론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트럼프는 때때로 자신을 비판하는 클린턴의 발언에 끼어들며 ‘트럼프답게’ 클린턴의 화를 돋우려 했으나, 같이 흥분했던 이전 공화당 경선 후보들과 달리 클린턴은 예상했다는 듯 침착하게 대응해 트럼프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았다. 경제·안보 등 현안에선 ‘준비되지 않은’ 모습도 보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토론에서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길 방법이 있다면, 그건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할 방법처럼 비밀로 남을 것”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티브이 토론의 결과가 실제 지지율에 미칠 영향에 대해선 의견이 나뉜다. 하지만 트럼프는 앞으로 두 차례 토론에서 더욱 공세적으로 나올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27일 <폭스 티브이>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턴 재단 특혜 논란, 벵가지 사태 등에 더해 빌 클린턴 성추문까지 끄집어낼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최근 폐렴 등 악재가 겹쳤던 클린턴은 27일 노스캐롤라이나 롤리 유세에서 “대선 과정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마침내 벗어났다”고 선언하며 1차 토론의 기세를 이어갔다.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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