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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미 공화당원 “클린턴이 될 것…그래도 트럼프 찍겠다”

등록 2016-10-23 19:01수정 2016-10-24 08:48

1차 토론 뒤 클린턴 3~4%p 앞서
상원의원 토론중인 공화당 본부
10여명만 관전…외부인에 경계심
패색 속 “트럼프 외 대안 있나”

대학생들 “지지후보 결정 못해”
거듭 질문 뒤에야 “클린턴”
역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플로리다주는 격전지 중의 격전지였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던 버락 오바마 당시 민주당 후보는 0.9%의 표차(7만4309표)로 밋 롬니 공화당 후보를 눌렀다. 2000년 대선에선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가 플로리다에서 537표 차이로 앨 고어 민주당 후보를 누르면서 가까스로 백악관에 입성했다.

정치전문 매체 <리얼클리어폴리틱스>의 여론조사 평균치를 보면, 플로리다는 지난달 26일 1차 텔레비전(TV) 토론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미세하게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역전에 성공하면서 22일 현재 3~4%포인트 안팎의 격차로 트럼프를 앞서고 있다.

굳이 수치를 들이대지 않아도, 공화당원들의 대선 승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있음은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었다. 지난 17일(현지시각) 저녁, 마이애미에서 차로 1시간20분쯤 떨어진 팜비치 카운티(시·군에 해당)의 중심지 웨스트팜비치 공화당 본부를 찾았다. 대선과 함께 선거가 치러지는 상원의원 자리를 놓고 공화당의 마코 루비오 현직 상원의원과 이에 도전하는 민주당의 패트릭 머피 하원의원이 지역방송 주최로 텔레비전 토론을 하는 날이었다.

‘함께 모여 티브이 토론을 보는’ 이벤트 공고를 보고 찾아갔지만 40평이 넘는 큰 사무실에 모인 인원은 1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공화당 당내 경선 과정에서 북적대던 선거사무실 광경만을 봐온 터라 내심 당혹스러웠다.

책임자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참석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비공개 모임이라 취재나 사진 촬영을 허가할 수 없다”는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루비오가 압도적으로 이기는 토론을 벌이고 있었지만, 열정이나 환호는 없었다. 루비오가 펀치를 날리고 머피가 수세로 몰릴 때마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나오는 정도였다.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가라앉아 있었다.

토론회가 끝나고 참석자들과 인터뷰를 시도하려 하자, 책임자가 “이러면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 수밖에 없다”며 인상을 구겼다. 트럼프 캠프는 이방인을 상당히 경계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이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점도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보였다.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 비치 카운티의 공화당 본부 사무실 입구에 도널드 트럼프 대선 후보와 마이크 펜스 부통령 후보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선거구호가 쓰여있다. 웨스트 팜 비치/이용인 특파원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 비치 카운티의 공화당 본부 사무실 입구에 도널드 트럼프 대선 후보와 마이크 펜스 부통령 후보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선거구호가 쓰여있다. 웨스트 팜 비치/이용인 특파원
빌딩 입구에서 토론 시청을 마치고 내려오는 당원들을 기다렸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70대 정도의 남성이 제일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당신이 루비오 지지자인 것은 알겠는데 트럼프도 지지하냐’고 물었다. 그는 “미국 정치는 너무 분열돼 있다. 클린턴을 찍는 민주당원이 머피를 찍는 것처럼, 나도 트럼프를 찍을 수밖에 없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곧바로 친구처럼 보이는 같은 나이 또래의 남성 한명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플로리다에서 누가 이길 것 같냐’고 물었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이라며 “내 친구들도 클린턴이 이길 것 같다고 말한다”고 거침없이 답했다. 그는 “플로리다 공화당원 대부분은 루비오를 찍겠지만, 그중에 트럼프를 찍는 사람은 85~90%정도가 될 것 같다. 루비오를 지지한다고 꼭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모르는 척 눙을 치며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트럼프는 실언을 많이 한다. 우리가 2주 전에 (음담패설 비디오 스캔들을) 봤지 않았느냐. 그는 생각을 하고 말해야 한다. 그는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참모들 얘기를 들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트럼프를 찍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고 하자,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누구도 완벽한 후보가 될 수는 없다. 트럼프를 찍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며 힘든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민주당에 정권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면서 트럼프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토론회에 참석했던 50대 중반쯤의 다이크스 부부는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들이었다. 미국 대선을 취재하러 왔다고 하자, 부인인 리나 엘스턴 다이크스는 다짜고짜 “어떤 후보를 위해 취재하는 것이냐”고 날카롭게 물었다. 주류 언론들의 ‘클린턴 편향성’을 공격해온 트럼프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한국 기자는 특정 후보를 편들지 않는다’고 둘러대자, 두 사람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남편 데이비드 다이크스는 “이제 미국 정치도 트럼프와 같은 새로운 사람이 나와서 바꿔야 한다”며 기성 정치권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려봤다. ‘트럼프의 여성 비하 테이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리나가 발끈했다. 그는 “10년 전의 당신과 지금이 똑같냐”며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면 바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골수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온갖 추문 속에서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일부 공화당 성향의 유권자들은 제3후보인 게리 존슨 자유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이애미의 한 식당에서 만난 퇴역 군인 앤드루 케네디(52)는 “나는 존 케이식(오하이오 주지사)이 공화당 후보가 되기를 원했다. 트럼프는 안 된다. 당연히 클린턴도 찍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도 존슨을 찍어봤자 대통령이 안 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트럼프나 클린턴을 찍기는 정말 싫다”고 말했다.

플로리다에서의 승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표심은 젊은층이다. 지난 18일 오후 마이애미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플로리다 애틀랜틱 대학’에서 만난 학생들도 클린턴을 지지할지를 놓고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3명의 학생 가운데 1명만 클린턴을 지지한다고 했다. 2명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생물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이 대학 1학년 아이린 카멜은 ‘누구한테 투표할 거냐’고 묻자 “결정하지 않았다. 나는 클린턴이든 트럼프든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카멜은 “트럼프는 미국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고, 클린턴은 거짓말쟁이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후보가 됐어야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스무고개가 이어졌다. ‘게리 존슨 자유당 후보를 찍을 거냐’고 물으니 “그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아예 투표를 안 할 거냐’고 하니, “투표는 할 것”이라고 한다. 질문에 질문이 거듭되고 나서야 결국 “투표장에 가면 클린턴을 찍을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했다.

클린턴이 플로리다에서 앞서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들에겐 설렘으로 다가오지 않는 듯했다. 역대 최고의 비호감 후보들 간 대결이라는 이번 미국 대선은 유권자들의 희망과 열정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웨스트팜비치(플로리다)/글·사진 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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