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 플로리다주 팜비치에서 주말 휴일을 보낸 뒤 해병대 헬기 ‘마린 1호’를 타고 백악관으로 돌아와 집무실로 향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워싱턴/UPI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때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자신을 도청하라고 지시했다”는 주장은 음모론이 진실로 둔갑하는 ‘페이크 뉴스’(가짜 뉴스) 생산 과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도청 음모론’은 보수 성향 변호사이자 작가인 마크 레빈이 지난 2일 오후(현지시각) 라디오 방송 <웨스트우드 원>에서 진행하는 ‘마크 레빈 ’쇼’에서 처음 내놨다. 레빈은 오바마 전 대통령 쪽이 ‘경찰국가’ 전술을 사용해 트럼프에 대한 ‘조용한 쿠데타’를 벌였다고 주장했다. 그라나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극우매체 <브레이트바트 뉴스>는 레빈의 의혹 제기를 ‘딥스테이트 게이트’라고 이름 붙여 보도하며 오바마 전 행정부에 대한 수사를 촉구했다. 1974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사퇴로 이어진 도청사건인 ‘워터 게이트’의 내부 제보자였던 마크 펠트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의 별명 ‘딥 스로트’에 빗댄 것이다. 이 매체의 칼럼니스트 조앨 폴락은 “이 사건은 ‘워터게이트’의 확대 버전”이라며 음모론을 정치 쟁점으로 부풀렸다. 다른 우파 매체들도 ‘오바마 게이트’ 운운하며 음모론에 가세했다. 거친 악담으로 유명한 보수파 정치평론가 러시 림보도 레빈의 ‘조용한 쿠데타’ 발언을 되풀이해 퍼뜨렸다.
<브레이트바트>의 보도가 나간 다음날인 4일 새벽, 트럼프는 뜬금없이 “오바마가 (지난 대선) 승리 직전 트럼프타워에서 내 전화를 도청했다는 걸 방금 알았다, 나쁜 사람!”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며 격앙된 반응으로 음모론에 화답했다.
다음날인 5일에는 우파 매체 <폭스뉴스>의 방송인 숀 해너티가 트위터에 “당신(트럼프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에게 도청 사건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언제 알았는지 물어볼 수 있다”고 부추기며 음모론을 오바마 정부의 소행으로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레빈이나 림보, 폴락 누구도 ‘오바마의 트럼프 도청’을 정식으로 보도한 적이 없으며, 서로 주고받기식으로 의혹을 사실로 몰아갔다. 미국 <시엔엔>(CNN) 방송은 6일 ‘음모론의 탄생: 트럼프의 ‘도청’ 주장은 어떻게 시작됐나’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맨 처음 도청 의혹을 주장한) 마크 레빈은 자신의 가설에 유리한 정보만 선택하고 배치되는 정보는 생략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 우파 매체들은 근거 없는 주장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다루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팩트 체크(사실 확인)’ 담당자인 글렌 케슬러는 “(도청 주장은) 불확실한 익명의 소식통들에서 나온 보도”라고 말했다. <시엔엔>의 백악관 출입기자이자 앵커인 제이크 태퍼도 “내가 아는 기자들 대부분이 이 문제(도청 의혹)을 파고 있지만 지금까지 들은 모든 이야기들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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