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사진 공모전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아프가니스탄’에 출품된 마리암 하시미의 <부르카 안의 풍경>. 유네스코 제공
최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한 이후 벌어지는 사태를 지켜보다가, 오랜 친구이자 유네스코 아프간 사무소에서 함께 일했던 나지파 누르와 23일(한국시각) 연락을 했다. 나지파 역시 지난 열흘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아프간에 살던, 아프간이라는 자신의 나라에 희망과 애정을 품던, 하지만 탈레반이 점령하기도 전에 그 아프간으로부터 도망쳐 결국 해외로 망명해야 했던 나지파는 그 누구보다도 탈레반의 집권에 대해, 그리고 20년은 더 퇴보할 아프간 여성의 인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나지파가 아프간을 탈출한 지 수년이 흘러 나지파의 안전이 확보된 지금에서야 나지파에 대한 기록을 하나 공개하고자 한다. 나지파는 내가 아프간에서 처음 만난 아프간 사람이었다. 생판 모르는 곳에 간다는 두려움을 뒤집어쓰고 온 아프간인지라 나는 당시 온몸에 검은 천을 두르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쥐며 카불 공항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그때 나를 발견하고는 박장대소를 하며 잘 왔다고 안아주던, 이곳을 바꾸려고 온 네가 이곳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머리의 스카프를 벗겨주던 동료가 나지파였다. 나는 그 이후 일부러라도 머리에 스카프를 쓰지 않았다.
22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여성들이 온몸을 덮는 ‘부르카’를 입고 걷고 있다. 카불/AP 연합뉴스
나지파는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사람 중 하나였다. 거의 독학했다는 영어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고, 심지어 나지파가 쓴 보도자료는 문학적인 아름다움마저 느껴졌다. 업무 처리는 창의적이고도 신속했다. 유네스코에 처음 발을 디딘 나는 나지파의 모든 것을 서툴게 모방하며 성장했다.
하지만 순수한 빛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나지파 누르는 언제나 어둠을 안고 있었다. 나지파에게 아프간은 너무나도 갑갑한, 맞지 않는 옷이었다. 나지파는 숱하게 울었다.
나지파뿐만 아니라 나지파의 언니들 역시 유엔에서 일했다. 첫째 언니는 미국에 있었고, 둘째 언니는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다. 언니 둘 모두 아프간 남자와 결혼했다. 가족에게 온갖 욕을 듣고서도 미국에 있는 사무소로 건너가 일을 하는 첫째 언니는 남편과 별거 중이지만 간간이 남편이 악몽처럼 끔찍하게 찾아왔다.
아프간에 있는 둘째 언니는 경력과 능력 면에서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해외 사무소에서 지속적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제네바에서 일하는 둘째 형부는 부인이 아프간에 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언니는 아이들과 함께 아프간에 남았다. 둘째 형부 역시, 잊을 만하면 둘째 언니에게 끔찍한 존재로 돌아왔다. 때리고, 욕설을 퍼붓고,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라고 말했다. 언니의 6살·4살배기 아들들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행동을 엄마에게, 그리고 이모인 나지파에게 흉내를 냈다. “밖에서 일하고 해가 떨어질 때 들어오는 이모는 창녀”라고 손찌검을 했다. 언젠가 나지파의 조카는 “자라서 이모를 죽이겠다”고 했고, 나지파는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나지파의 모든 이야기를 소름 끼칠 만치 괴로워하며 받아들였다. 매번 떠나라고, 도망치라고 외쳤다. 하지만 나지파는 늙은 부모를 걱정하며 망설였다. 나지파는 나보다 한살 어렸고, 그 당시 나지파의 나이는 아프간에서 처녀로서는 상당히 많았다. 나지파의 부모님과 큰오빠는 나지파가 어서 결혼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나지파는 언니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고, 매년 필사적으로 결혼을 피했다.
유네스코 사진 공모전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아프가니스탄’에 출품된 아지즈 아지지아르의 <카불대학교 여학생들>. 유네스코 제공
어느 봄날이었다. 한국에서 휴가를 마치고 아프간으로 돌아오는데, 카불에서 예상치 못한 시위가 벌어져 예정된 일정보다 이틀이나 늦게 도착했다. 다음날 사무실 책상 위에 나지파의 “다녀오겠다”는 짧은 메모가 초콜릿과 함께 놓여 있었다. 나지파는 내가 본래 도착하기로 되어 있던 날짜로부터 이틀 뒤 휴가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꼬인 일정 때문에 늦게 도착한 나는 떠나는 나지파를 보지 못했다.
며칠이 흘렀다. 나의 상사 사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실 나지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나지파의 부모님이 결국 나지파 몰래 어떤 아프간 남자와 나지파를 서류상 약혼시켰다는 것이다. 이슬람 율법하에서 나지파는 이제, 세상 어디를 가도 그 남자에 종속되는 상황이었다. 이곳에선 언제고 어떤 명분으로 명예살인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이 믿을 수 없던 사실을 곱씹고 받아들인 나지파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챙겨 홀로 아프간을 떠났다.
사라와 나를 제외한 사무실의 다른 모두에게 이 사실은 비밀이었기에 우리는 며칠을 하염없이 조용히 울었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친구이자 동료를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잃었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슬펐다. 몇달이 흐르고, 나지파와 겨우 연락이 닿아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용감한 그녀는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정착해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그 후 두달 동안, 나와 사라는 일주일에 두세개씩 추천서를 써서 기업체들에 보내주었다. 거짓을 쓸 필요가 없었다. 나지파는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직원이었기에 우리는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그리고 또 넉달 뒤, 나지파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은 직장을 구했고, 그곳에서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나지파와 함께 울고 웃었다. 너무도 기쁘고 또 슬픈 날이었다.
23일 전화통화에서 나지파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유네스코에서 함께 일하던 때에 아프간 여성들을 위한 문화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나누며 미래의 아프간을 그리던 때가 꿈결같이 떠오른다 했다. 하지만 나지파는 다시금 내게 날카롭게 물었다. 지난 20년 동안 아프간 여성들을 돕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의 국제 원조가 아프간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많던 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간 아프간의 여성 인권은 과연 유의미할 정도로 신장되었던가?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것만으로 하루아침에 아프간의 여성 인권이 종잇장처럼 뭉개졌다면, 그건 수치로만 존재하는 가짜 인권이 아니었을까?
지난 20여년간 아프간에 주둔하던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들이 가장 큰 노력을 쏟았던 문제는 단연코 여성 인권 문제였다. 아프간에는 2001년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이 실각한 이후에도 오랜 시간 뿌리 깊은 여성 차별이 이어져왔으며,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심했다.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여자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일은 흔하디흔했고, 조혼을 강요하고, 명예살인을 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다만 그 비율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다. 탈레반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성인이 되고 사회에 진출하면서, 수도 카불, 그리고 다소 개방적인 분위기의 바미안을 중심으로 여성의 옷차림이 간소화되었고, 대학에 다니는 여성 비율이 늘었으며, 여성의 스포츠 활동이 조금씩 장려되기 시작했다. 정부 고위 인사 중에서도 여성 비율이 늘어나는 편이었고, 이들은 그 어떤 남성 못지않게 일을 잘한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하던 여성에 대한 아프간의 사회적 분위기는 이번 탈레반의 집권으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나는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을 기억하는 어머니 세대는 온전히 감옥 같던 시기가 되돌아올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눈까지 망사로 가려 온몸을 덮는 푸른색 부르카는 이들에게 천으로 된, 그저 감옥이었다. 남자 가족 구성원과 함께하지 않을 때면 집 밖을 나가지 못했던 당시의 시간들은 ‘나’라는 정체성을 서서히 잃는 과정이었다.
탈레반을 겪지 못했던 현재의 젊은 세대 역시 집 밖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숨어 있다. 국제기구의 영향과 전 아프간 정권하에서 배웠던 일하는 여성의 이미지, 자기 주도적인 삶의 꿈은 탈레반의 반여성적인 공포 정치와 완전하게 대립한다. 탈레반 대변인이 강조하는 여성 인권 존중에 대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탈레반의 주장을 신뢰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실제로 중앙 탈레반의 기조가 그렇다 하더라도 중앙이 지방의 하위 조직까지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탈레반의 대다수가 여성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송첫눈송이